홍성담은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다. 모지고 비극적인 역사와 끊임없이 대면하며 그렇게 눈물 흘리면서도 그는 지옥 세계, 아수라 세상과의 조우도 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했다는 홍성담은 이제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위협하는 모든 악(惡)에 저항하는 것을 자기목적이자 자신과의 약속이라 선언한다.
예술가의 선언은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물러섬 없는 사유의 전투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자기을 내던져 악과 대면하는 가운데 울리는 슬픈 노래다. 제주 4.3, 세월호 참사, 위안부 합의까지 슬픈 역사와 마주하며 작가는 '이제까지 제대로 된 나라가 있기는 했느냐'고 묻는다. 2010년 이후 작품 60여점을 전시한 <세월오월과 촛불> 개인전은 그런 홍성담의 물음이 독자들과 만나는 시공간이다.
누군가는 홍성담의 작품을 말하며 직설과 풍자를 끌여들이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에는 해원(解寃)의 소망이 담겨 있다. [작품-제주4.3고](2014)에서 홍성담은 망자들의 손목과 목을 흰 천으로 서로 매듭지어 고풀이하는 '그림 굿판'으로 망자들의 원한과 상처를 씻어내고자 한다.
그렇게 굿판이 진행된 후 [작품-낳을 생生-한라산](2015)에서 작가는 젖먹이와 백발노인의 서러운 죽음을 붉은 별똥별에 새기는 한편 백록담의 거룩한 생명 잉태에도 주목한다. 그래서 홍성담에게 한라산은 "펄펄 끊는 마그마를 머금은 활화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순결한 목숨을 낳는 생명의 산"이다.
65년 박정희의 한일 협정도, 2015년 박근혜의 위안부 협상도 모두 미국의 요구에 응답한 결과라고 말하는 홍성담은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위안부 협상에서 사라져버린 소녀들의 고통을 <봉선화> 연작을 통해 드러내보인다. 잠시 홍성담의 문장을 따라 <봉선화>연작을 읽어보자.
"예쁜 사람 기다리며 빨간 꽃물 들이는 소녀[작품-봉선화1-여름]는 어디론가 멀리 멀리 끌려간다[작품-봉선화2-가을]. 그곳에서 소녀는 서러워도 울지 못하고, 몸에 가득한 부끄러움은 겨울 눈밭에 꽃으로 피기를 간절히 기도[작품-봉선화3-겨울]한다. 저들이 세상에 토해내지 못한 소리를 제 몸으로 받아낸 소녀의 비명소리에 새벽 하늘의 별도 사라져버린다.[작품-봉선화4, 봉선화5]"
하늘의 별도 사라져버리게 한 비극은 소녀의 비명소리에서 멈추지 않고, 진도의 세월호까지 이어진다. "비극은 반복된 역사 속에 존재한다"는 홍성담의 생각은 틀림없다. '세월호 물고문 학살' 사건. 그는 세월호 참사를 그렇게 부른다. 그에 따르면 <세월호> 연작은 '위로하는 그림'이 아니다. 단순한 위로로 해원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직면해야 한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홍성담은 독자들에게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작품-마지막 문자 메시지-에어포켓, 친구와 마지막 셀카], 그들이 마지막에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작품-내 몸은 바다3-기억교실], 그들의 원혼이 지금 어디를 서성이고 있는지[작품-내 몸은 바다4-청와대의 밤]를 직면하게 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보편적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예술가의 자기 고백이 묻어나는 작품은 역사가 된다. 역사가 된 작품은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기억과 삶으로 녹아든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강제도, 통제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그렇게 하기 위해 홍성담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