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마음 오지 여행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2)
늦은 오후 공항버스를 타고 오사카역에 내렸을 때 느낌은 약간 비현실적이었어요. 1시간 남짓한 비행으로 재미없는 세상에서 생동감 넘치는 세상으로 슉-하고 넘어온 것 같았거든요. 일본에서 연수도 하고 수십 번 오갔던 친구 미숙도 코로나 기간의 공백 때문인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우리가 묵을 호텔이 고가도로 너머로 보여 지하도를 지나 올라오니 또 다른 고가도로가 가로막고 있더군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드디어 호텔에 들어가 가방을 부려놓고는 잠시 침대에 누워 ‘지금 여기는 오사카’를 되뇌며 몸보다 한참 느린 영혼-아직도 서울 상공을 헤매는-을 영접했지요. 저녁을 먹으러 다시 나간 오사카역 주변의 밤은 추위를 잠시 잊을 만큼 반짝였어요. 바로 앞 백화점에서 가장 유명한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연말 분위기로 화려하게 꾸며진 오사카역 주변을 돌았지요. 유럽과는 다른 휘황찬란한 밤거리를 걸으며 현지인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면서 서울은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다음 날은 미리 신청해 둔 교토 1일 투어를 갔어요. 오사카 자유여행을 와서 교토를 알차게 돌아보려는 사람들이 무려 4대의 관광버스를 꽉 채우더군요. 가는 곳마다 각국의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아라시야마’의 대나무숲은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산소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았어요. 겨울에 떠밀려가는 늦가을의 정취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지요. 거기엔 내 전용 사진사라도 된 듯 포인트마다 세워 사진을 찍어준 친구의 배려가 있었어요. 그렇게 집을 떠나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자식도 아닌 개별자로서 존재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해요.
금각사에서 연못 주변을 돌아 정해진 시간에 투어버스에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데 버스 통로 건너편 여성이 친구에게 말을 걸었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와 같은 부산 출신이었어요. 남편과 함께 오사카 자유여행과 교토 1일 투어를 신청했는데 여행 하루 전날 남편 회사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혼자 여행하게 된 여성이었어요.
그렇게 다음 여정부터 부산 출신 세 여인이 함께 다니게 됐지요. 학교 이야기를 하다 그녀가 우리가 다니던 여고와 같은 재단의 여중 출신이란 걸 알게 됐어요. 7, 8년의 나이 차가 있어 동시대에 여중, 여고를 다닌 건 아니지만 같은 지역, 같은 재단의 학교에 다닌 사람을 교토 투어 중 만난 게 너무 신기했어요. 게다가 학교 졸업 후 모두 서울 수도권에 정착한 것도 같았어요. 마침 그녀의 숙소도 우리가 묵는 호텔 근처였어요. 교토 투어를 마치고 오사카로 돌아온 세 여인은 장어덮밥으로 저녁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녀는 남편이 못 오게 되면서 남은 1일 자유 지하철권 1장을 우리에게 줬어요.
다음날, 셋이 함께 오사카성을 돌아보고 시내 면세가게에서 쇼핑 후 출출해진 배를 길거리에서 다코야키로 채웠어요. 어린 시절부터 가리는 음식이 많고 먹는 속도도 느려서 길거리음식은 거의 먹어보지 못했어요. 친구들이 다 먹을 동안 절반도 못 먹을 게 뻔하고 쫓기듯 먹으면 바로 체했으니까요. 그런 내가 오사카 길거리에서 부산 출신 여인들과 함께 다코야키를 먹은 일은 오래 기억에 남을 거예요. 그곳은 명동만큼이나 사람들로 북적였거든요.
아침부터 많이 걷고 쇼핑까지 한 뒤라 호텔에서 좀 쉬다가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어요. 후배에겐 우리가 다녀온 유명한 함박스테이크집을 소개해주고 친구와 나는 스키야키를 먹으러 갔어요. 어느새 여행 마지막 날 저녁이더군요. 매일 맛집을 안내해 준 친구 덕에 서울에서와는 달리 식사 시간이 정말 즐거웠어요. 좋은 계절에 오랜 친구와 새로운 곳을 구경하고 맛난 음식을 나누는 동안 내가 온전히 현재를 누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드라마틱한 서사가 아니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요즘이에요. 특별히 잘나지도, 많이 가지지도 못한 내게는 더더욱요. 오늘 하루 내 안을 넘나드는 사소한 생각과 그에 따른 행동들 그리고 그 흐름 속에 이뤄지는 나와 타인의 인간적인 교류. 그 하루하루가 모여 내 삶의 무늬를 만들어 가는 것이겠지요.
내가 살던 곳에서 1시간 남짓 날아왔을 뿐인데 그전까지 사방이 벽인 것만 같던 세상은 사라지고 무한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건 역할에 매몰된 나를 등 떠밀어준 남편과 내 손을 잡고 낯선 풍경 속으로 이끌어준 친구 덕분이었어요. 그전에 수없이 떠난 여행들에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이순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금, 내게 다정한 표정으로 말을 거는 듯했지요.
1인당 일정액 이상 쇼핑 때 주는 혜택을 받기 위해 세 사람의 쇼핑 물품을 한꺼번에 결제할 때 선뜻 자기 카드로 결제한 후배. 난 친구가 결제한 줄 알았거든요. 야경 구경을 위해 다시 만날 예정이긴 했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지요. 더구나 낯선 나라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신뢰의 경험은 무척 특별했어요.
여 행
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시 전문>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의 심장을 고동치게 할 일이 또 있을까요? 오사카에서 내가 만난 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내 마음이었어요. 와병 중인 엄마와 어떻게든 소통하고 싶은 마음, 그런 나를 애써 일본행 비행기에 태운 남편의 마음, 애달파하는 내 손을 잡고 기꺼이 여행 길잡이가 돼 준-먼저 친정엄마를 여읜-친구, 처음 만난 나를 믿고 자기 카드로 먼저 결제한 후배의 마음 등 오사카 여행은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 준 여행이었어요. 내 마음의 오지(奧地)뿐만 아니라 엄마의 마음, 남편의 마음, 친구의 마음, 그 많은 마음속 오지를 들여다본 덕에 이번 여행은 ‘마음 오지 여행’이라 부르려고 해요.
알래스카의 오로라를 보러 떠나는 여행이든, 폼페이 유적을 답사하는 여행이든 모든 여행은 결국 내 마음속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오지를 향한 여정이 아닐까요. 한 번도 내게 내보인 적 없는 엄마 마음의 오지를 헤아리면서 흩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누구의 딸만이 아니라, 누구의 아내만이 아니라, 누구의 엄마만이 아니라 나는 그 모든 것의 총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마음, 하나의 세상이니까요.
*표지사진은 아라시야마 대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