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어웰>을 보고.
‘단지 3개월 남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처음에는 충격을 받을 거고,
그럴 리 없다 부인할 거고,
현실을 원망하게 될 거고,
마지막에야 받아들이는 게 수순이라 들었다.
그런 다음에는 뭘 하게 될까?
예상 사망일에 동그라미를 쳐 놓고는
인생 정리를 시작할 거다.
하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
해야만 하는 것들을 일정에 맞춰 실행해 나가며
죽음을 준비하지 않을까.
사실 이즈음 되면
오진 받았던 사람도 죽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만약 가족들이 그 사실을 숨긴다면?
영화 속 ‘빌리’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빌리’의 가족들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에게도
진실을 알리지 않기로 결정한다.
서양과는 다른, ‘동양의 가치’라는 걸 내세우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픔은 ‘할머니의 것’이 아닌, ‘가족들의 것’이 된다고 했다.
가슴 시린 고통을 감내하는 게 가족으로서의 ‘의무’라고도 했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일상’을 선물(?)하고는,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던 일본과 미국으로 떠난다.
너무 가슴 아프다며 눈물 철철 흘리면서 말이다.
시한부 당사자 입장에서는 뭐가 더 나을까?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3개월을 살아나가는 게 맞을까?
아니면, ‘의사는 괜찮다고 했는데 왜 이리 몸이 안 좋아지지?’ 하는 의문을 계속 품다가,
마지막에 숨을 헐떡이며 병원에 실려 가 ‘당신은 곧 죽는다’는 말을 듣는 게 나을까.
가족 입장에서는 어떨까?
죽는다는 사실에 미리 고통받는 당사자를 바라보는 게 더 힘들까,
아니면 순진무구한 얼굴로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는 비극의 여주인공을 보는 게 더 힘겨울까?
어쩌면 ‘빌리’의 가족들은 ‘내가 대신 고통을 짊어지리’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는
당사자가 진 삶의 무게를 가벼이 여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노인이 정리할 삶이란 게 뭐 있겠어?," 이러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모르는 노인을 남겨두고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떠난다.
출발할 때는 당연히 흐느껴 울지만 곧 잠이 들어 버리는 거다.
심적 고통에 시달리느라 지쳐 쓰러진 것도 있겠지만,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한 발 뺀 듯한 안도감도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이젠 매일 그 가슴 아픈 현장(?)과 맞닥트리지 않아도 되는 거다.
그래서 내겐 그들이 일상으로 ‘도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다 할머니를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영화가 시종일관 우울했기에, 마지막 반전이 더욱 기가 막히게 다가왔다.
덕분에 아주 산뜻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다.
사실, 기적은 있다.
아주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지어지는 아파트 행렬을 비추며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비록 중국에 이전 것들이 허물어지고 서양의 것들이 들어서고 있기는 하지만
동양의, 아니 중국의 전통 가치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아니, 서양의 그것들보다 더 힘이 세다고.
보라고.
이렇게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았느냐고.
영화를 보고는 아들에게,
내게는 꼭 (내가 언제 죽을지)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싫다고.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내게 말해 주는 게 힘들 거고
슬퍼하는 날 바라보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게는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아들은 얘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아주 아주 가끔이지만, 간혹 일어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난 화성 대기에 존재하는 산소 같은 확률에 베팅하느니,
미리 듣고 아는 편을 택하고 싶다.
마지막에 마음을 들여 잘 정리하고 떠나는 게,
이제까지 나와 함께 해 준 내 삶에 대한 작은 감사와 예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