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김두식)을 읽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그 말에 따르면 20년이라는 시간은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다. 강산의 변화를 두 번이나 되돌린 2004년은 애플의 아이폰이 출시되기 3년 전이자 아직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남아 있을 시기이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니 정말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하루하루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20년은 더더욱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은 2004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2011년, 개정 작업을 거치긴 했지만, 초판과 큰 줄기는 비슷하다. 저자는 최상위의 규범으로서 기능하는 헌법, 그리고 헌법이 그려낸 풍경 속에서 구체적으로 태동하는 우리 사회의 움직임을 소개한다. 책의 제목은 헌법을 명시하지만, 법학 전공 수업에서 배우는 헌법 조문에 관한 학설 대립이나 판례평석의 형식이 아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가의 올바른 역할에 관해 일상 속의 예시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사회 내에서 움직이는 구체적인 현안들에 다가가는 법률가의 모습,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법률가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등에 관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래서 본 책의 흐름은 제목인 ‘헌법의 풍경’이라기보단 헌법 위에서 움직이는 ‘법률가의 풍경’에 가깝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는 민주사회에서 헌법은 그나마 가장 높은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 헌법은 곳곳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대적 진리 찾기’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고, 잠깐만 들여다보아도 헌법과 법률 속 대부분의 규정들이 공정한 절차 확보를 위해 마련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77p)
김두식 교수가 바라본 헌법은 다양한 가치가 모두 존중받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이다. 헌법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대적 진리 찾기의 공정한 절차를 보장함으로써 민주사회를 견인한다. 신의 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규범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단선적이고 일면적인 가치만을 유지하는 대신, 관용을 통한 평화를 유지하면서 법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헌법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자기 한계 고백’으로 민주주의를 피워내는 토양이 된다. 이러한 헌법은 비록 약 40년간 같은 조문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었다. 합법성을 내포한 법률이 정당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위헌법률심판이 진행되고, 그 결정에 따라 하위 법률이 개정되기도, 심지어는 폐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추동하는 법률가는 일견 정적으로 보이는 헌법이 동태적일 수 있도록 새 법을 만들고, 그에 따라 법률 활동을 이어가다가 다시 한계를 만나고, 그리고 또 새 법을 만든다. 그래서 저자가 바라본 헌법의 풍경-그리고 법률가의 풍경-은 정적이지 않고 동태적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주지하였듯 본 책은 2004년에 처음 쓰여 2011년 약간의 개정 작업을 거쳤으나 내용과 형식은 대부분 초판의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헌법이야 1987년 제9차 개헌 이후 아직 개정된 바가 없으니 강산이 두 번 변하든 세 번 변하든 여전히 ‘현재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본 책에서 헌법 조문 자체나 판례에만 집착하지 않고 사회 전반과 헌법 하위 법률,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법률가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면 20년이라는 시간의 터울은 큰 괴리감을 낳았어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두식 교수가 소개하는 ‘헌법의 풍경’은 결코 오래되어 보이거나 생경하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
저자가 책을 출간했을 당시와 달라진 것들도 물론 많다. 변호사시험 점수는 더 이상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으며, 법조인 친분 단계를 점수화하여 제공하는 서비스는 위헌결정을 받았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이 퇴직한 검찰 고위 관료만을 위한 자리라는 비판은 이제 과거만큼의 타당성을 얻기는 힘들어 보이고, 저자가 주장하던 검찰 수사권 조정 역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책의 흐름이 익숙해 보이는 것은 아직도 헌법의 풍경이 약자에게 냉혹하며 강자에겐 온난할 수 있다는 쓴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언론과 수사기관의 밀접한 관계는 여전히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에 열중한다. 당장 얼마 전 있었던 유명 연예인들의 수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이 검찰 공화국이라는 저자의 비판은 2024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키워드 중 하나이고, 일상 속의 차별은 과거와 비교하여 더욱 교묘한 형태로 사회 속에 녹아들었다. 헌법은 여전히 약자에게 살풍경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역으로 모르는 자가 아무것도 보지 못해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기 전, 20년 전의 작가가 남긴 목소리는 오랜 시간을 거쳐 아직도 우리 사회에 울림을 준다. 사법고시에서 법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완전히 전환된 시점에서 다양한 분야의 법률 전문가 양산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실체적 진실을 함께 만들어가는 법률가와 시민들의 의식은 어떻게 고양되어야 하는지, 궁극적으로 민주사회에서 개인과 제도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숙제를 던진다. 오래전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존재하기에, 그것을 바라보고 해결해야 하는 공동체의 숙제도 역시 여기에 있다.
최근 대학가에서 법조인을 향한 관심이 뜨겁다. 법조인을 꿈꾸는 대학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법학적성시험 응시 인원과 법학전문대학원 경쟁률 통계가 보여준다. 아직 학생 입장이기에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저자가 주지했듯 과거와 비교하여 출신 학부·전공·배경 등이 다양한 인재들이 법조계를 다채롭게 구성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다양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식인이 되겠다는 뻔한 말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다만, 다양성을 머금은 법조계가 기성세대가 우려하는 법조계로 환원되지 않도록, 그래서 20년이 지난 문제의식을 다시금 답습하지 않도록, 당사자로서 노력하고 경계해야 함을 느껴본다. 헌법의 풍경이 어제보단 더 포근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