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요조)을 읽고
이제까지는 에세이에 큰 흥미가 없었다. 특정 장르에 대한 거부감은 아니었다. 그저 활자로 읽어낼 수 있는 뚜렷한 서사나 정보에 조금은 더 관심이 갔을 뿐이다. 이왕 시간 내서 책을 읽을 거라면 관심 있는 분야의 책에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하니까 말이다. 관심의 차이는 자연스레 독서 습관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독서 습관에서 기인한 빈도의 차이는 심적인 거리로 이어졌다. 책장을 메운 책들의 편향적 구성을 자각한 후에야 에세이에 손이 가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손을 뻗지 않았을 에세이 장르를 기쁜 마음으로 읽어낼 수 있던 건 한 선물 덕분이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하나의 배출구와 같다. 점수로 환원되지 않을 글이라는 생각에 더욱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뱉고 그것들을 약간 정돈한 수준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감사하게도 그런 수준의 글을 읽고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한 친구는 나의 글을 읽고 떠오른 작가가 있다며 이 책을 선물해주었다. 요조 작가의 『실패를 사랑한 직업』, 작가의 흥미로운 필명도, 마침 실패에 관해 잔뜩 생각해왔던 시기라는 점도, 그리고 선물한 친구의 따뜻한 마음도, 책을 향한 흥미를 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 모습을 보고 좋은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괜히 기분이 좋다. 첫째로는 내가 다른 무언가를 연상시킬 만큼 인상적인 자극을 주었다는 생각 때문이고, 둘째는 연상된 대상이 감사하게도 좋은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친구는 나의 글을 읽고 요조 작가의 문체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으면서 괜스레 신이 났다. 나라면 결코 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일상의 순간들을 그려낸 문체가 예뻤고, 그런 문장들을 떠올리는 매개가 과분하게도 나였다는 것이 즐거웠다.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을 땐 관심사도 같네!-하는 이유 모를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책을 선물한 친구는 에세이가 좋은 이유를 묻자 타인의 삶을 기꺼이 가깝게 살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필요한 관심이 때론 개인을 옥죄기도 하는 세상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그려내고 독자는 조용한 곳에서 홀로 그 이야기와 마주한다.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기회는 광범위하지만,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고요하며 협소하다. 요조 작가가 바라본 삶의 모습을 그녀의 시선과 문체로 바라볼 수 있어서 편안했고, 잔잔했고, 안온했다. 친구가 에세이를 넘기며 느꼈을 편안함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했다.
요조 작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제주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가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만나고 겪는 이야기들은 그녀만의 언어로 세상에 소개된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요조 작가는 누군가를 닮아감으로써 성장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방법이 내가 (스스로 자각해오진 못했지만) 선택해온 방법과 닮아있어서 흠칫 놀랐던 부분이다. 나는 스스로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미숙한 점밖에 떠오르지 않던 시기부터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나를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그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었고, 부족한 점을 보듬어주었으며,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우스갯소리로 그들 덕에 ‘사람은 되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오랜 지인들을 떠올렸을 때 친밀함을 넘어 고마움과 존경심을 함께 떠올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좋은 사람인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하고 싶었고,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그들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누군가가 좋다고 말하는 나의 어떠한 모습은 여러 친구의 다양한 모습을 조금씩 닮아있다. 작가의 글을 좇아가며 공감으로 인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제까지 닮고자 노력했고 지금도 닮아가려 애쓰는 여러 친구의 모습이 한 명씩 떠올랐다.
겪지 않은 타인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던 건 작가가 무심한 듯 눌러낸 언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찰나의 자극에 민감해져야 이야기를 포착할 수 있지만, 그것을 민감하지 않게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에세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지면으로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나는 느끼지 못했을 일순의 감정을 포착해내는 것도, 그리고 이제껏 막연히 느꼈던 감정과 타인의 언어로 표현된 감정 간의 유비를 발견하는 것도 모두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어의 가치를 알고 현명하게 표현하는 친구로부터 그러한 기회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소중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흑백 표지만큼이나 무해한 이야기 속에서 포근한 위로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