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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Dec 07. 2022

오뎅을 먹다가 울뻔했다 [소,우주]

소소한데 우주적인 에세이


몇 년 전 제보를 받아 기사를 썼다. 대학원 입학 비리가 의심되는 사건이었다. 여러 교수들이 학생의 입학에 관여한 내부 자료를 확보했다. 주변 교수를 인터뷰하고 시험지도 입수하면서 전모가 서서히 드러났다.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여러 편 썼다. 내용의 이해를 돕기위해 기사를 쉽게 풀어 설명한 기사까지 썼다. 이렇다 할 의미있는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징계를 받지도 않았다. 그 기관의 블랙리스트 맨 윗단에 나의 이름이 있다는 귀띔 하나만 돌아왔다. 그러다 최근 TV에 유력한 공모자 가운데 한 명이 전문가로 출연한 것을 보았다. 정.말.로 바뀐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사회 지도층이 감옥 대신 병원에 머물다 슬그머니 풀려나는 과정에서 누가 관여했으며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를 폭로했다. 화제가 되었지만 변화는 없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보건인권 실상을 고발하는 기사를 삼년 넘게 썼지만 외교부의 현지 지원 확대와 같은 의미있는 변화는 없었다. 정신장애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기사도 5년넘게 쓰고 있지만 변화는 미미하다.     


내 기준에서 기사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예민한 정치 사안을 다루지 않으니 변화는 극히 드문 것인지, 기사를 못써서 그런 것인지, 이름하야 ‘큰 스피커’가 아니라 그런 것인지 방법을 고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긴 시간을 들여 어렵게 쓴 기사가 소위 블로그 글만 못하다는 사실은 언론인을 맥빠지게 만든다. 써봤자 아무 변화도 없는데 고생스런 무엇하러 하느냐는 자괴감과 무력감이 고개를 들면 또다른 취재에 달려들 마음이 사라지고 만다.


십수년 동안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허무주의와 싸워야 하는 것은 필시 기자라는 직업을 고른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여기에 허무주의에 딸려온 우울은 짊어져야 할 짐일 것이고. 이런 감정들로 흔들리면 일상에서 문제가 생기곤 하니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것들 역시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매체 소속 저널리스트들도 이런 우울함에 시달리나 보다. 최근 개봉한 영화 ‘그녀가 말했다’는 할리우드의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를 추적한 뉴욕타임스 소속 기자들의 취재 과정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허구의 산물일 테지만 영화 속 뉴욕타임스 기자들은 극심한 허무주의와 두려움에 시달리며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작중 성범죄를 폭로하고 가해자에게 되려 소송당할 수도 있다며 두려워하는 피해자들을 어떻게 설득하냐는 후배 기자의 질문에 선배는 이렇게 대꾸한다. 변할 수 있다고 설득해야한다고.     


그 별 것 아닌 대사에 주책맞게도 나는 조금, 아니 많이 감동받았다. 전날 술을 마시고서 출근 길에 오뎅을 사먹다가 나는 코끝이 쨍했다. 그 말 한마디에 말이다.       


변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은(그게 남이든 나 자신이든) 어렵다. 더러 기만적이기도 하다. 어떤 변화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사로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을테니까 적당히 참으라던지 잊어버리라고 하는 편이 더 쉽다.      


숙취가 남아있어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난 오뎅을 씹으면서 아직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변할 수 있다고 내가 나 자신을 설득하고 싶었다. 기를 쓰고 기사를 써도 대체로 변하는 것 하나 없지만 변할 가능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설득되고 싶었다.      


허무주의와 싸우고 우울을 씹어 삼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일 수도 있다. 누가 뭐라 하든 말든 난 기사 하나가 어쩌면 많은 것을 바꿀 지도 모른다는, 그런 종교 같은 믿음을 갖기로 했다. 그런데 또 오뎅 먹고 싶다.




위의 글은 엊그저께 쓴 칼럼을 브런치에 맞게 손본 것인데, 칼럼이 나가고 나서 오늘 독자들께 이메일을 여러통 받았다. 모두가 응원의 글이라 너무 고맙고 찡하고 그랬다. 힘을 많이 받았다. 그 중 하나를 골라 브런치에도 함께 소개한다.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저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하며 기사를 읽는 것이 취미인 평범한 직장인 독자입니다. 기자님께서 겪으셨을 허무함을 위로하기에는 제 경험이 부족하고 배움 또한 얕아,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적어야 할 지 고민스럽습니다. 서투른 글이나, 기자님과 같은 우울감으로 고생하실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여 몇 자 적어봅니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서 이야기하기를 인류의 거의 모든 서사가 거대한 우주 속의 푸른 점 하나일 뿐인 무대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논지와는 다를 수 있겠으나, 거대한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자님께서 열심히 기사를 쓰시는 것을 포함한 인류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천문학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일이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라며 허무주의에 빠진 인류는 보이저 1호를 발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작은 푸른 점 하나 위에 살았던 어느 무명의 과학자가 이루어낸 작은 성과가 아니었더라면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를 뚫고 올라가지 못 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사람들 모두가 가치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정받는 정도는 다를 수 있으나, 당시 학계나 산업의 유행, 정부정책 등의 정치사회적인 사유로 달라질 뿐이지, 개인의 선의와 직업정신으로 일궈낸 성과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기자들을 멸시하는 풍조 역시 한 때의 유행일 뿐이며, 주목받지 못하는 글도 시대를 잘못 만났을 뿐이리라 믿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존경받는 기자들의 훌륭한 기사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때가 올 것입니다.


부디 기자님께서 쓰신 글이 세상을 변화시킬 영향력이 없다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청년이 기자를 희망하는 데에 당신의 기사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글귀에 감명받아 사회 운동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계기로 사람들은 바뀔 수 있습니다. 느리지만 계속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사람도, 세상도 바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변화에 일조하는 좋은 기사를 앞으로도 많이 써주시리라 믿습니다.


변변찮은 글솜씨에 글이 너무 길어져, 읽으시기에 지루하실까 이만 줄일까 합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독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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