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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Dec 21. 2019

뮤지컬 머더발라드

‘사랑의 치킨게임.’이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서사가 되는 방법.


  뮤지컬 <머더 발라드>는 아시아브릿지컨텐츠의 김수로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3년 국내 초연이 올라왔다. ‘사랑의 치킨게임’이란 당시에 제작사 측에서 보도자료로 사용했던 타이틀이다. 사실 이 홍보문구는 머더발라드를 잘 함축한 단어이다. 머더발라드의 강점은 매혹적인 공연 분위기와 강하면서도 듣기 좋은 락 넘버에 있다. 서사는 이것들을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그래도 머더발라드의 서사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톰과 세라는 뉴욕의 연인이다. 둘은 열렬히 사랑하지만 톰이 더 성공하기를 갈망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좋지 않은 끝을 맞이한다. 그 후 세라는 뉴욕 밤거리에서 톰과는 전혀 다른 남자인 마이클을 만난다.
  시인인 마이클과 안정적인 사랑을 다시 시작한 세라는 마이클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 마이클은 시인 생활을 그만두고 회사에 취직한다. 둘의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마이클 때문에 세라는 육아와 가사에 치인다. 어느 날 세라는 자신의 삶이 ‘담배 한 대 필 여유’조차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쯤 톰이 근처에 바를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톰과 다시 연락을 시작한다. 톰과 세라는 다시 만나 전보다 더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마이클은 달라진 세라를 눈치 채지만 가정을 덜 신경 썼던 자신과 환경에 잠시 지쳤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처럼 톰의 바에서 밀회를 나누던 세라에게 톰은 ‘아이는 하나나 둘, 좀 더 나은 삶을 약속할게.’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은 세라는 톰과의 불륜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깨닫고 가정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톰은 자신을 떠나려는 세라를 용납하지 않고, 마이클과 세라와 아이 앞에 나타나서 자신과 세라가 다시 만나고 있었다는 걸 밝힌다.
  그 후로 마이클을 세라에게 화를 내고 셋은 톰의 바에서 다시 재회한다. 마이클이 톰에게 달려들어 싸움이 시작되고 톰이 마이클을 야구방망이로 내려치려는 순간 세라가 톰과 마이클 사이에 껴들어 마이클을 보호한다. 마이클과 세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세라는 마이클에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빈다. 그리고 이 둘을 화해한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세라는 톰이 그날 바에서 톰을 짝사랑하던 바텐더에게 살해됐다는 기사를 보며 공연은 끝이 난다.


  나는 <머더발라드>를 꽤 좋아했다. 록적인 분위기와 강렬한 넘버가 좋았고,  배우들의 힘을 바로 앞에서 느낄 수 있는 무대 구성도 좋아했다. 하지만 볼 때마다 서사의 찝찝함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머더발라드>에서는 애초에 ‘이 이야기는 그냥 별거 아닌 이야기’라고 말을 하며 이들의 행동을 ‘썩은 생선을 포장한 선물박스를 가지려 싸우는 이라고 말한다. 단지 뮤지컬의 장면들을 이어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클리셰적인 서사를 작중 안에서 냉소적으로 비웃으면서 공연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관객들 또한 서사가 아닌 넘버과 공연의 아우라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영리하고 잘 만든 공연이다. 이런 공연에서 서사의 진부함을 지적하는 건 사실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걸 알기 때문에 서사의 찝찝한 부분들도 개인적인 감상으로 남겼을 뿐 무어라 말을 한 적이 없다.



서사의 찝찝한 부분이란 이런 부분을 말한다.

  세라는 결국 불륜을 저지른 여자다. 그리고 그 벌로 마이클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용서’를 받은 세라는 다시 가정에 합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라가 다시 탐에게 연락한 이유, “담배    여유조차 없었던 상황이 걸린다. 그런 상황이 세라를 톰과의 만남으로 이끌지만, 톰 또한 세라에게 가정을 요구한다. 세라는 불륜을 한 ‘부도덕한 여성’이 되기 때문에 마이클이 세라에게 주는 모욕은 응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톰과 비교했을 때 ‘좋은 남편감’이라고 생각되는 마이클이 불같이 화를 내며 부르는 넘버는 킬링 파트로 통하기도 한다. 배우들이 얼마나 거기서 상처 받은 연기를 잘하느냐, 얼마나 무섭게 세라를 모욕하느냐는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기도 한다.

  결국 머더발라드의 서사를 재정의 하면 이렇게 된다 : 정상가족으로의 편입에 성공했지만 가부장제 아래의 정상가족에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이 금기를 저지르고, 결국 다시 사회의 정상가족 테두리에 편입하기 위해 모욕을 감내하고 용서를 구한 서사.


  재차 말하지만, 머더발라드에서 서사를 지적하는 건 사실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매혹적인 뮤지컬이 어느 찝찝함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는 건 여전히 아쉽다. 이 아쉬움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왼쪽은 세라 역의 박서하 배우. 오른쪽은 나레이터역의 장은아배우. 이 글에서 나레이터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멋있으니까.

톰과 세라가 퀴어 여성이 될  때 생기는 일

  당연히 있다. 톰을 여성으로 설정하면 된다. 남성이던 톰을 여성 캐릭터로 만들기만 해도 이 공연은 아주 풍부한 퀴어, 여성주의적 서사를 포함하게 된다.

  첫 장부터 뮤지컬이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불같은 사랑을 하는 톰과 세라, 그리고 더 나은 꿈을 위해 세라에게 이별을 고하는 톰과 톰에게 배신당하고 이성애자 남성을 만나 정상가족체계 안으로 편입하는 바이섹슈얼 세라가 존재한다.

  남녀 부부, 그리고 귀한 자식 하나. 이 정상가족이 중상층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세라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의 꿈을 접고 돈을 버는 남편과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 아이를 위해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좋은 엄마와 아내로서 세라는 정상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의 ‘보편 가족’이란 세라와 맞지 않는다. 세라는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곧 그 가부장적 가정 질서에 질려 다시 톰을 찾는다. 세라가 톰을 다시 만난 건 희생으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세라를 아내나 엄마가 아닌 세라로 봐주는 인물을 향해 세라는 도피를 감행한 게 된다.

  톰이 여성이 되고 세라가 바이섹슈얼이 되면 마이클이라는 캐릭터는 자연스럽게 가부장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담론을 대표하게 된다. 그는 시스젠더 이성애자이고, 그가 결혼 후 가정을 위해 행동하는 모든 방식이 그렇다. 그리고 그 방식 안에서 스스로를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그’의 가정이고 ‘그’에게 주어진 가정이다. 그 안에서 세라의 의견은 두 번째가 되고 세라는 ‘그’의 가정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조력자의 위치로 전락한다.

  예를 들어, 마이클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시인을 계속해도 세라는 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세라는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다. 마이클은 아이를 무조건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어 하고, 세라에게도 그에 걸맞은 부모가 되기를 은연중에 강요하지만, 세라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라고 이미 극 중에서 되묻는다. 이처럼 마이클과 그의 가정은 ‘흠결’ 없는 정상가족의 그림을 그리며 달린다. 이 이데올로기로의 편입에 세라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다시 톰을 만나게 된다. 내레이터의 넘버 가사 중 “평범한 사랑 이야기로 끝났을 이야기라는 가사가 있다. 여기서 평범이란 정상성을 뜻하게 된다. 정상성은 곧 보편의 가족, 이성애 가족이다. 세라는 그 안에서 도피가 필요했다.

  톰이 레즈비언 여성이라고 가정해보자. 세라가 톰을 만난 이유는 세라가 가장 자유로웠던 시절에 톰과 함께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톰이 가부장제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라는 탈출을 시도하지만 톰의 생각은 다르다. 톰이 남자라면, 톰이 가정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우리는 그저 탄식만 하게 된다. 톰마저 완벽한 도피처의 역할을 해주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시절을 모두 알고 있는 세라와 ‘익숙’하고 ‘편안’ 한 상태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세계에서 세라는 도망쳐왔는데도 말이다. 한 마디로 이성애자 남성인 톰은 세라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인 톰이 꺼내는 ‘결혼’과 ‘정착’은 다른 뉘앙스로 읽힐 수 있다. 퀴어 여성에게 정착이란 하나의 도전이다. 이성애자 남성에게 결혼과 정착은 보편적으로 삶의 과정이다. 나이가 차면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일이다. 사회에서 ‘가장’으로써의 지위, 즉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곤고히 하고 그 안으로 섞여 들어가 특권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다. 톰이 여성이 되면, 이런 결혼의 의미가 없어진다. 결혼이란,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훨씬 힘든 일이고 결혼이란 것의 의미는 세라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수단이다. 톰이 후반부에 보이는 세라에 대한 집착과 이어지게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이는 하나나 ,  나은  약속할게’의 말에서 ‘삶’이라는 말 또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더 나은 삶이란, 적어도 가부장적 가정을 벗어난 어떠한 지점을 같이 누릴 수 있다는 뜻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세라는 톰이 아닌 마이클, 그러니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선택한다. 세라는 이미 어떠한 가정의 형태를 경험했다. 그것에서 나온 불유쾌한 경험들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톰과의 가정, 즉 하나의 도전이 되는 삶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톰의 가정 얘기를 듣고 자신의 아이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프랭키  정말 괜찮아. 얼마나  사랑하는지라는 가사를 떠올려보자. 세라에게 가정의 존재이유느 프랭키이다. 톰이 세라와의 불륜을 마이클에게 알리러 공원으로 찾아왔을 때 세라가 가장 신경쓰는 건 톰도, 마이클도 아닌 프랭키이다. 그 후에 세라가 톰에게 분노하는 지점도 “딸이 보는 앞에서  모욕”한 지점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결국 세라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여성이 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여성이 그렇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약속하는 안식들. ‘마이클’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며 자유를 빼앗기지만 그렇게 얻게 되는 ‘정상 가족’의 삶들을 놓아버리기란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세라는 이미 아이가 있다. 톰이 가정을 약속할 때 세라는, 이제 정말 돌아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세라에게 톰은 한여름밤의 꿈같은 도피처였던 것이다.


  그리고 톰이 마이클을 자극했을 때, 톰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위협하는 인물이 된다. 퀴어 여성의 존재는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위협한다. 마이클은 바이섹슈얼인 세라를 무사히 가부장제 안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정말 작중 인물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아니라, 구성적인 면에서 이러하다), 톰이 나타나고 마이클의 가정을 위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클을 화를 낸다, “당신이 그러고도 엄마야.” 이건 세라를 수치스럽게 한다. 세라가 이 이데올로기로의 편입을 위해 애썼던 모든 희생들을 수포로 돌리는 듯한 말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못해준  도대체 뭐야.”는 앞서 말한 가부장적 시각과 동일하다. 마이클이 세라에게 하는 말인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이렇기 때문에 세라가 프랭키를 생각하는 마음과 다르다. 마이클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라기 보다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하나의 장치와 연결고리로써의 사랑이 된다. 마이클은 자신이 구출해내서 자신의 가정 안으로 편입시킨 세라를 사랑한다.

  톰과 마이클의 육탄전에서 결국 톰이 이기는 서사 또한 톰이 퀴어 여성일 때 더욱 돋보인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달려드는 남성과 그런 남성을 제압하는 여성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마지막, 세라가 마이클과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마이클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 또한 훨씬 기괴하게 다가온다. 세라는, 가부장제의 편입을 위해 다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마이클의 용서를 받고 난 뒤에야 마이클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이클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정상가정이 다시 안정을 되찾자, 톰은 바텐더의 손에 살해된다. 가부장제를 위협한 퀴어 여성에 대한 응징이다.



‘퀴어극’ 머더발라드의 의의

  원래도 해피엔딩은 아닌 공연이다. 그 공연이 여성주의와 퀴어 서사를 만나서 결국 퀴어 여성 둘이 가부장제를 이기지 못하고 승복하거나, 무너지는 걸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공연은 무언가를 해소시키지 않고 끝나버리고, 그 후 커튼콜에서는 전혀 반대되는 분위기로 배우들이 나와서 관객들과 신나게 넘버를 부른다.

  그 후 관객은 서사가 온전히 해소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한 기분도 아닌 상태로 집에 돌아가게 된다. 서사와 객관적 거리를 벌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벌어진 거리에서 다시 공연을 되짚을 때 관객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세라가 마이클의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며 끝났기 때문에 이 공연은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고 단지 퀴어 여성을 응징한 공연일까? 아니다.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은 세라. 그리고 세라의 삶의 변화. 공연은 분명히 세라의 삶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가부장제를 비웃고 있다. “우린 모두 무덤을 팠어 누군가는 거기에 묻겠지.” 묻어지는 건 톰이 아닐 수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누가 어떻게 묻힐 건지는 알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사회는 언제나 가부장제의 편이고, 현실은 언제나 이성애자 남성의 손을 들어준다. 탈출에 다가갔으나 끝내 탈출하지 못한 여성, 즉 세라를 보며 관객은 아쉬움의 탄식을 뱉게 된다.

  또한 극 중에서 톰이 은근히 꺼낸 ‘결혼’ 얘기. 그것이 톰에게는 왜 중요한 일이었고 세라에게는 아니었는가.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나? 또 톰의 결혼과 마이클의 결혼은 어떻게 달랐나?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정리해보며 관객들은 손쉽게 이 서사가 결국 가부장제를 조롱하고 퀴어 여성에게 연민을 보이는 공연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공연 안에서 말하는 “예쁜 상자 안에  폭탄이란, 공연 자체를 지칭하게 된다. 단순히 톰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기만 해도 사랑의 치킨게임은 이렇게 퀴어적, 여성주의적 서사를 획득하며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킨다. 물론 이런 가정과 해석에 비약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약이 있다면 좀 어떤가. 톰이 여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재밌어지는데 말이다. 이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톰을 여성에게 주길 희망해야한다. 톰을 완벽히 소화할 여성 배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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