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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Oct 31. 2019

여자 빅터와 여자 괴물을 보고 싶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볼 때마다 했던 생각.

https://youtu.be/7FGg0fxbSUw

안유진 배우의 <생명창조>


  말도 많고 탈고 많았던 <프랑켄슈타인>의 OST를 샀다. '덕후'가 그러듯이 일단 사두고, 비닐도 뜯지 않고 놔뒀다가 얼마 전에야 리핑을 끝냈다. 옥주현이라는 배우를 데려와서 「생명창조」가 아닌 「산다는 것」을 부르게 하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공연에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 이지수 배우와 안시하 배우의 목소리는 한 글자도 실지 않은 OST을 들으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왕용범 연출은 빅터나 괴물을 절대 여자한테 주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옥주현이 와도 말이다.
  하지만 빅터와 괴물이야 말로 여자가 한 번쯤은 맡아야 하는 캐릭터이다. '멋지니까 시켜봐라'가 아니라, 여성일 때 공연이 더욱 많은 의미를 띤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고 여자에게 아무 배역이나 다 시켜보는 시도는 계속 필요하다. 악역, 단역, 주연 가리지 않고 여자에게 시켜봐라. 제발.) 내가 김칫국을 잘 마시는 성격인 건지, 내심 5~6년 뒤에 여자 빅터 여자 괴물을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OST의 상태를 보니 택도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왜 여자 빅터와 여자 괴물이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공연을 더 풍부하게 하는지 한번 설명해보려고 한다.


남성 중심 세계에 갇힌 여성, 빅터 프랑켄슈타인.



  빅터는 어떤 인물인가. 빅터는 죽음, 운명, 저주 같은 미신 같은 속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저주와 운명을 맹신하는 인물이다. 빅터는 어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다시 말해서 애도를 이루어내지 못한 조금 똑똑한 아이 었을 뿐이다. 그런 아이에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설명을 준 어른은 없었고 빅터가 어머니의 시체를 데려오니 어머니는 ‘마녀’가 되고 빅터는 ‘마녀의 아이’가 된다. 이미 전염병에 대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결국 빅터를 ‘저주받은 아이’로 만들어버린다. 이 일을 계기로 빅터는 모든 사람들을 멀리하고 자기 자신에게 이 세사의 저주가 내렸다고, 운명이란 그런 거라고 믿게 된다. 자신은 믿음을 부정하지만 빅터는 극 내내 저주와 운명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다.
  만약에 빅터가 여자였다면 빅터 자체가 ‘마녀’가 된다. 굳이 어머니를 '마녀'로, 빅터를 '마녀의 아들'로 한번 둘러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마녀'는 무엇인가. 아주 오래부터 단어 자체에 역사적 차별과 속박이 담긴 상징이다. ‘마녀’라는 단어의 넓은 함의를 빅터라는 캐릭터가 그래도 안을 수 있다. 똑똑한 여자가 마녀로 불리던 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아무튼, 빅터를 '마녀'로 만든 건 빅터가 발 붙이고 살고 있는 세계이다. 빅터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저주, 운명은 공연 끝가지 빅터를 따라다니는데, 이 저주와 운명 또한 세계가 빅터에게 준 것이다. 빅터는 자기 스스로를 저주받았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만약에 빅터가 이것들을 그냥 넘겨버릴 수 있었다면 빅터는 다른 세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빅터는 저주와 운명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혐오하면서도 갇혀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빅터는 ‘나는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다.’라는 간략한 사고를 하지 못하고, 그 대신 ‘이 세계에서 저주와 운명을 없애겠다.'라고 선언한다. 이런 빅터의 사고도 빅터가 여성이라면 더욱 강화된다. 저주와 운명은 불가피한 것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들이다.  세계는 '여자'빅터의 운명을 이미 정해뒀다. 그리고 빅터는, 그 운명을 완전히 반하는 길을 걷는 캐릭터가 된다. 그렇기에 전쟁터로 나간다. 저주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정확히는 자신이 저주받은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빅터의 서사는 이미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길을 찾도록 설정되어 있다. 빅터가 여성이 된다면, 시대와 역사가 여성에게 주는 저주와 운명이라는 속박을 빅터가 안을 수 있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최대 맹점은 단 하나의 미래 넘버를 듣고 앙리가 빅터에게 설득당했다는 점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뮤지컬을 좋아하는 관객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중 하나이다. 대체 빅터가 저주를 벗어나고 싶은 것과 시체 재활용 연구에 어떤 연관성이 있고, 그 연관성을 「단 하나의 미래」에서 어떻게 어필하고 있냐는 점이다. 농담으로 하는 말들이겠지만 여기에 바로 열쇠가 있다. 빅터가 여자라면, 납득이 가능하다.
  빅터는 자기 손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싶어 하고 한다. 그건 곧 신에 대한 도전이다. 신이란 빅터에게 저주와 운명을 준 존재이고 빅터는 신의 세계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은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빅터가 여자라면 ‘생명창조’ 장면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바뀌어버린다. 신은 이미 여자에게 생명을 창조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빅터는 ‘아버지 신’이 준 창조의 수단, 즉 생식기의 사용을 거부하고 감히 조물주 아버지처럼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탄생시키려 한다. 그게 생명창조이다. 아버지 신이 준 방법, 즉 운명의 흐름대로 생명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 신과 같은 방법으로 생명을 창조시키는 것, 즉 기존 신의 세계에 대한 저항이며 반항이다. '신이여 축복을 아니면 차라리 내게 저주를 퍼부어라 신과 맞서 싸운 나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가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기존의 빅터들이 이러한 함의를 갖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다만 빅터가 여성이 된다면, 빅터의 서사가 갖는 상징과 의의가 훨씬 강화될 것이며 이렇게 예상치도 못하게 어떠한 장면들이 더 좋은 의미를 띨 수 있을 것이다.
  ‘나 언제까지 그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나 제발 벗어나고 싶은 저주받은 내 운명’이라는 문장을 여성이 뱉을 때의 함의를 생각해보라. 공연은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될 것이다.



전형적 딸의 서사, 괴물.

까뜨린느


  빅터는 아버지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괴물은 태어난 지 10분도 안 돼서 사람을 물어 죽인다. 빅터가 손으로 탄생시킨 ‘사생아’는 실패한다. 마치 헤라가 혼자 만든 헤파이토스처럼, 빅터는 괴물을 버린다. 괴물은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버림받는다.
  태어나자마자 존재를 부정당하고 버림받은 인물이라니. 괴물의 서사는 굉장히 여성적이다. (재미있게도 이건 원작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도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이미 현대의 많은 비평가들이 괴물의 서사를 여성의 서사로 바라보고 있다.) 특히 한국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를 부정당하고 지워진 여자들의 나라가 아닌가. 빅터가 세계가 주는 마녀의 역사를 그대로 안을 수 있듯이 괴물 역시 여성의 역사를 그대로 안을 수 있다. 불합리한 세계에 아무런 준비 없이 내던져진 괴물은 자신의 창조주를 증오한다. 공연 후반부의 북극 씬에서 괴물이 솔로 넘버를 한 곡 부른다. '신이 되고 싶었지만 무책임한 인간일 뿐. 인간은 왜 이 세상이 자기 거라 생각할까.' 기억이 흐릿해 정확하진 않으나 대략적으로 이런 가사였다. 그 넘버 자체가 괴물이 빅터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픔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단어 그대로 인간을 뜻하기도, 남성의 세계를 뜻하기도 하는 이중 언어로 작동할 수도 있다.
  빅터가 여자라면, 그리고 괴물 또한 여자라면. 괴물이 빅터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슬픈 일이 된다. 창조주와 피조물, 다시 말하면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딸들이 엄마에게 갖는 양가적인 감정 '엄마도 불쌍하다.' '하지만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다.'를 괴물이 사유하게 된다. 거기에 한국적 사유 하나가 더 따라온다. '그리고 엄마도 나에게 잘못했다.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 엄마가 불쌍한 것과 나의 불행은 별개이면서 뗄 수 없을 만큼 연관되어 있다.'
  괴물은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으로 나오고, 살인 격투를 하게 된다. ‘여긴 비명 소리 가득해 남자들만의 세계’라는 대사처럼 살인 격투는 전형적인 남성 폭력이 전시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가장 흥미롭고 강한 괴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괴물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남성의 공간에서 남성성을 획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단순히 폭력을 남성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이 공연에선 그렇다. 살인, 전쟁, 목적 없는 혐오, 폭력, 위선, 운명과 저주 모두 빅터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들이고 이건 곧 아버지 신의 세계, 가부장 세계가 되며 남성의 것으로 치환된다. 빅터와 괴물이 여자라면 말이다. 어쨌든, 괴물은 이 세계와 같아지기를, 이 세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빅터와 괴물을 위해 죽어야 했던 여자 캐릭터들.

엘렌


  프랑켄슈타인을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은 모든 관객이 동의할 것이다. 일단 빅터 주의의 여성 캐릭터들이 그렇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빅터 때문에 희생당한다. 엘렌과 줄리아 모두 빅터를 걱정하고 빅터가 나아지길 바라지만 결국 빅터의 일에 휘말려 희생당하는 캐릭터다. 빅터가 여자가 된다면 결국 ‘성녀’의 롤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두 캐릭터도 빅터와 전혀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엘렌은 유사 어머니에서 벗어나고 남성 캐릭터를 위해 희생당하는 캐릭터도 아니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을 볼 때마다, 여성 배우들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길이면 좋아하는 여성 배우들을 떠올려보며 나만의 프랑켄슈타인을 복기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걸리는 장면이 있었다. 빅터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굳게 잠겨있던 성의 열쇠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슈테판 시장에게 빅터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 아버지의 성입니다. 이제 제 성이기도 하고요.’ 그 안에서 엘렌은 빠졌다. 그런 시대니까?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에선 시체의 목을 잘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지 않는가. 이 장면이 늘 아쉬웠다. 마치 연출이 엘렌을 대하는 태도가 저 한 마디에 모두 드러난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빅터가 여자라면 이 대사는 모순점이 된다. 엘렌이 장녀고 빅터는 차녀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엘렌인데 어떻게 빅터가 성을 가졌지? 만약에 빅터가 여성이 된다면 이 부분을 위해 엘렌의 서사가 추가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나는 엘렌의 얘기를 더 듣고 싶다. 그리고 관객이 모르는, 아마 쓰여 있지도 않을 엘렌의 인생사를 생각해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빅터가 여성이라면, 그리고 빅터가 성을 가지게 됐다면 내가 생각하는 엘렌의 서사는 이렇다.


  엘렌은 빅터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난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이미 엘렌은 사교계에 데뷔했을 나이다. 엘렌 이미 약혼자가 있었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나 빅터 사건 이후 그 모든 게 흐지부지 된다. 하지만 이미 결혼을 준비했던 엘렌이었기 때문에 빅터의 아버지는 유언장을 수정한 뒤였고, 엘렌은 성을 받지 못하고 성은 차녀인 빅터에게 돌아간다. ‘이젠 제 성이기도 하고요.’라는 말을 하면서 빅터는 엘렌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엘렌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유사 어머니를 너머 빅터에게 커다란 상처와 아픔이 되고, 죄책감이 된다. 엘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빅터는 엘렌과 멀리한다.

  줄리아가 죽을 때도 그렇다. 극은 줄리아라는 캐릭터를 너무 할 정도로 홀대한다. 재연 때 단 하나뿐인 줄리아의 넘버와 함께 줄리아의 결혼 씬이 없어진 건 천 번을 욕해도 서운함이 풀리지 않는다. 줄리아가 여성 캐릭터 그대로 남는 게 더 좋겠지만 대극장이고 중장년의 비율을 무시할 수 없는 공연이니 아마 결혼 서사를 위해서는 남성 캐릭터로 각색돼야 할 것이다. 많이 수정될 것 없이 이미 줄리아의 남성형 이름인 줄리앙이 있다. 빅터를 이해하고 기다리는 젠틀한 남성형 캐릭터.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슐리 같은. 나쁘지 않다.
  남자 캐릭터 때문에 죽는 여성은 또 있다. 바로 까뜨린느이다. 괴물이 여자가 된다면 까뜨린느와 괴물의 관계도 변한다. 극한의 남성성(폭력)만 남은 공간에서 가장 힘이 세지만, 누구도 죽이지 않는 괴물을 보면서 까뜨린느가 한 두 마디 정도는 더 던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처럼 힘이 세었다면 나는 여기를 떠났을 거야. 북극으로 가버릴 거야.’  '나도 너 같은 힘이 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같은 대사 말이다. 그럼 괴물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더 깊게 사유할 수밖에 없고, 그게 공연 밖의 서사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까뜨린느와 자신의 차이는 뭘까. 까뜨린느는 왜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걸까. 그렇게 까뜨린느는 괴물의 업보가 되고, 까뜨린느가 품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대로 괴물이 받게 된다.

  재밌지 않은가? 인상 깊게 봤던 공연들을 여자로 상상해보는 건 나에게 꽤 재밌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은근히 여성 캐스팅을 갈망하게 된다. 관객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고리타분한 가부장 남성 연출들도 거침없이 여자에게 배역을 주게끔 만들 수 있을까?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잠깐 부르는 거 말고, OST 특별 출연 말고, 본 공연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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