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자다. 뜬금없이 왜 이런 얘길 하냐 하면 내가 야구장에 갈 때 마다, 가는 횟수가 더해지면서 더 더 더 내가 기자임을 상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산을 또 한 번 다녀와서, 나는 인스타그램에 야구 관련 짤을 올리는 부계정을 팠다. 야구장에 가면 TV 카메라 앵글이 잡아주지 않는, 나만 보는 선수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서 자주 폰카를 여기저기 들이댔다. 예를 들면 3루에서 보는 투수의 피칭 같은 거, 불펜과 더그아웃 풍경, 선수들이 출퇴근길에 저벅저벅 걸어가거나 팬들이 내미는 야구공 등에 사인하는 모습, 팬들과 함께 셀카를 찍는 모습, 혹은 팬들이 선수 혼자만의 독셀카(?)를 요구하는 모습 등등.
처음에는 야구장에서의 직관은 '집관'에서 얻을 수 없는'실감'을 위해서이므로, 나의 실감을 방해하는 각종 촬영 행위는 최대한 금하자는 마음이었다. '나의 오감으로 오롯이, 온전히 느끼리라!' 그러나 야구장을 찾는 횟수가 더해지며 나의 오감이란 것이, 기억력이란 것이 얼마나 소박하고 기준 미달인가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됐다.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야구장에서의 내 기억력은 적어도 내 바람보다는 미달이었다.) 야구장에서는 대부분 과각성 상태였기에, 더욱 온전한 집중이 힘들기도 했다. 내가 찍은 짤들 앞에서 나는 자주 무력해졌다. 거기엔내 눈으로는 캐치하지 못했던 디테일한 야구장의 장면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는 선수의 눈빛 같은 거, 선수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 입꼬리가 올라갈락말락하는 미소인지 미소가 아닌지 분간이 어려운 움직임 같은 거, 타자가 대기타석에서 배트를 붕붕 움직이며 왼쪽 오른쪽 방향을 바꿀 때 미묘하게 멈칫하는 시간차 같은 거.
그것은 TV 야구 중계나 여타 유튜브 채널에선 볼 수 없는, 오롯이 나의 시선을 따른 것이기에 더욱 의미있었고 나의 모자란 기억력을 보강하는 소중한 자원이 됐다. 비록 야구장 1열을 수놓는 대포여신+남신에 비해서는 매우 작고 소중하고 결과물이지만. 그걸 깨닫고는 놓치기 싫은 순간엔 나의 눈보다 먼저 카메라의 눈인 렌즈를 주저없이 들이댔다.
여기엔 나의 기자 시절에서 비롯된 기록벽이 한 몫 했다. 10년 전, 수습 기자 때부터 나는 주구장창 기록에 기록을 거듭해왔다. 취재원의 말을 받아적고, 녹취하고, 취재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고, 필요하다면 영상도 찍었다. 팩트를 다루는 기사의 특성상 기억에만 의존하기엔 한계가 있었고, 혹시나 모를 사고(취재원의 발뺌) 등에 대처하기 위해 나를 방어할 증거가 필요했다. 오죽하면 하리꼬미(수습 기자들이 경찰서 기자실에서 숙식하며 취재를 이어가는 일)를 하던 수습 기자 시절에는 자다 깨서도 잠꼬대처럼 메모를 했다. 신새벽 기자실에서 자다가 갑자기 깨서는 스마트폰 액정에 컴싸(컴퓨터용 사인펜)로 뭔가를 끄적이다가 다시 잠드는 나를 보고, 당시 기자실의 동거인들(a.k.a. 타사 기자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메모에의 압박이 몽유병처럼, 렘 수면 상태에서도 나를 추동한 거였다.
아무튼 그렇게 인스타 계정에 차곡차곡 나의 작은 결과물들을 찍어 올리고, 영상 재생 횟수가 올라가고 덩달아 '좋아요'도 늘었다. 가장 뿌듯했던 것은 NC에서 갑작스럽게 방출된 데 이어 삼성으로 입단하게 된 투수 테일러 와이드너의 영상을 올렸을 때다. 나에게는 대전의 한화이글스파크에서 찍은, 퇴근길에 와이드너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셀카 찍을 것을 청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있었다. 피칭 중의 와이드너는 고글 탓인지 인상이 날카로워보이는데, 고글을 벗은 경기장 밖 와이드너는 웃음기 많은 얼굴이어서 그 낙차가 돋보였다. 와이드너의 방출 기사가 나왔던 그 날, 나는 그 영상을 업로드했다. 'Good bye, Taylor.' 라는 글과 함께 그를 태그했다.
그랬더니 이후 그 게시물에는 와이드너가(家) 사람들이 와서 '좋아요'를 눌렀다. 추정컨대 와이드너의 부인과 어머니였다. 이후 NC의 또다른 외국인 투수 에릭 페디의 짤을 몇 개 올렸더니 페디의 어머니가 나를 팔로우 했다. 아마도 이국 땅에서 일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러, 인스타그램을 유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책임감이 부풀어 올랐다. 경기장에서 훈련하는 페디, 퇴근길 사인하는 페디, 선발 등판 직전 불펜에서 몸 푸는 페디 등등 부지런히 페디를 찍어 올렸다. 게시물마다 콕콕 페디 어머니 칼라 페디의 꽉찬 하트표가 박혔다.
나의 인스타 본 계정보다 부계를 보는 시간이 더 길어지던 찰나, NC와 SSG의 문학 경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문학에는 8월 8일, 혼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폭염이 이어지던 나날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바베큐존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인파가 있어서 '놀랠노자'로 기억에 남은 구장이었다. 한 번 다녀왔으니, 이번엔 생략할까 했다. 그러나 직전 금요일인 8월 18일 잠실에서 열릴 예정이던 두산전을 보려고 교통체증 속 2시간 걸려 잠실에 갔다가, 경기 시작 직후 '우천 취소'를 맞았다. 참을 수 없었다. 예정에 없던 8월 22일 SSG전을 예매했다. 고양에서 산 넘고 물 건너 1시간 30분만에 문학 경기장에 도착했다. 실은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보고 고민하던 끝에 예매취소하려다 취소 시간을 놓쳐 울며 겨자먹기로 경기장에 온 케이스였다. 경기 시작 시간에 임박해 도착해, NC 구단 버스를 넋놓고 보고 있는데, 박민우 선수가 지나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뭐지? 이제 곧 경기 시작인데 왜 나오는 거지?' 하고 있는데 안중열, 이용찬, 임정호, 류진욱 등등의 선수가 줄지어 따라 들어갔다. 그 순간 티켓링크에서 뒤늦은 문자가 왔다. 그라운드 사정으로 취소라는 내용이었다. 그, 그래서 줄줄이들 들어갔구나… 뒷통수를 둔기로 한 대 맞은 듯한 울림이 뒤늦게 왔다.
두 번의 경기 관람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난 후, 나는 오기란 것이 생겨버렸다. 두 번이나, 그것도 경기장에 와서 바람을 맞다니. 참을 수 없는 굴욕이자 억울함이자 빡침이었다. 안 그래도 정규시즌 종료가 다가와서 초조해 죽겠는데, 한 경기 한 경기가 너무나 소중한데 이럴 수가 있나. 일기 예보를 신중히 본 뒤, 기상청을 출입하는 기상 담당 기자인 친구에게도 여러번 문의 한 뒤, 8월 24일 문학에서 열리는 SSG전 마지막 경기를 지르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간다. 보고야 만다. 늘 동행하던 Y는, 이날은 취업 면접을 앞두고 있어서 함께하지 못했다.
그렇게 8월 24일, 나는 문학으로 갔다. 오전에는 여의도에서 라디오를 하고, 정오에는 일 관련 미팅을 한 뒤 인천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삼고초려하는 길이라, 마음이 자못 비장해졌다. 문학에 가는 나에게는 또 하나의 미션이 있었다. 지금까지 다녀온 삼성라이온즈파크를 제외한 전국 8개 구장들 가운데, 문학은 마산과 더불어 가장 선수들 사인을 받기 어려운 구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하주차장과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통로가 이어져 있다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길이 없을까 싶어(친구를 통해 엔팍에서 NC 선수들 포토카드를 뽑아온 이후 거기에 사인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모락모락 솟아 올랐다) 미친듯이 구글링한 결과, 어느 블로거가 올린 '문학 구장에서 선수들에 사인 받는 법'을 보았다. 비밀 댓글을 달아 정확한 좌표를 물어봤고, 거기가 어딘지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러저러한 사명(?)과 또 '우취'를 먹을지 모른다는 복잡한 심경을 안고 문학으로 가는 공항철도에 몸을 실었다.
오후 4시 30분쯤, 문학야구장에 도착했다. 웬걸, 비가 다시 내렸다. 아니 오늘은 비 안 온다며! 기상 담당 기자인 친구는 '30분 뒤면 그칠 것'이라며 이른바 '이슬기 원포인트 강수'라고 했다. 하, 이렇게까지 사람 맘을 졸이게 하다니. 맘 같아서는 제갈량이 되어 기우제 아닌 기청제(날이 맑기를 기도하는 것)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친구 말처럼, 비는 몇 분 뒤 거짓말처럼 그쳤고 나는 야구장 근처 카페에서 보다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경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오며, 또 한 번 내 마음은 요동쳤다. 투수들의 중간 외출길을 기다려 사인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짐을 챙기고, 유니폼으로 갈아 입고 길을 나섰다. 블로거분께 들은 대로 착착 길을 걸어나갔다. 그랬더니 왕복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NC 구단 버스 3대와 마주하게 됐다. 이미 두 명의 팬들이 먼저 와서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 기다리세요?" "송명기 선수요. 누구..?" "이용찬 선수요." "아, 아까 투수들 먼저 들어가서 이용찬 선수도 버스 안에 들어가 있을 거 같아요." "아..." 마무리는 보통 중외길에 가장 먼저 버스로 들어가 가장 나중에 나오는 것을 나는 여러차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글렀구나' 싶었지만 도통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아일체로 '버스 = 나'의 지경이 될 것 같았던 그 날의 대치.
옆에 있던 팬들이 송명기 선수와 만나 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이윽고 NC 버스 3대와 내가 왕복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외롭게 대치하는 상태가 됐다. 날은 개서 점점 더워오고, 짐을 한 가득 든 나는 거북목을 하고 갈라파고스 아니 문학의 한 마리 거북이 되어 표표히 버스를 쳐다보고 섰다. 짙은 선팅을 한 버스는 묵묵부답이었지만, 저 안에서는 내가 보이겠거니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났다.
사실 나는 기다림에 무척 익숙하다. 기자에게 지금도 통용되는 취재 기법인 '뻗치기'를 기자 시절 밥 먹듯 해왔기 때문이다. 뻗치기는 취재원이 지나다닐만한 길목에서 무작정 기다려 질문을 던져 대답을 듣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세월호를 비롯한 여러 재난 현장에서, 빈소에서, 사건의 피의자 집 앞에서 꾸준히 기다렸다. 대체로는 실패했지만, 그 기다림을 가엾게 여긴 유족들의 인류애로 가끔은 의미 있는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다. 사생활 침해 등의 측면에서, 뻗치기가 좋은 취재 기법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무조건적으로 나쁜 취재 기법이라는 데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시작된 발화가 취재원 자신에게도,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니가 기사 쓰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누군가 응수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 말도 맞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런 류의 기다림에 꽤 자신이 있다. 다만 내가 힘든 건, 기다림 끝 목적 달성에 실패했을 시 업무적으로 좌절을 입은 것 마냥 패배감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Y는 경기장에서 사인 받기에 실패하거나 불렀는데 선수가 뒤돌아보지 않거나 하면 "심남한테 까인 기분"이라고 전했다. 나는 늘상 업무적으로 하던 일이라 그런지, 사인 받기에 실패하면 '타사에 물 먹은 거 같은 기분'이 됐다. ('물 먹는다'는 것은 기자들의 '낙종'을 의미하는데, 같은 출입처의 타사 기자가 먼저 '단독 기사'를 쓴 상황을 뜻한다.) 놀러 가서는 왜 쓸데없이 일을 피곤하게 만드냐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애초에 승부욕이 강하고 매사 전투적인 나의 회로가 그렇게 굴러가는 것은 나의 통제 밖의 일이었다.
12일 만에 다시 온 문학이었다. '쓱동산'인 문학은 야구테마파크라는 느낌이 강했다. 먹거리가 삼겹살부터 크림새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술도 맥주뿐 아니라 선수들 이름을 붙인 와인까지 판매했다. 스포츠 구단 최초라는 키즈존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야구장 먹거리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 빼고는 모두가 라면이든, 마라새우든, 한돈이든,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랜필의 명물이라는 크림새우를 먹었지만, 이번에는 생략했다. 대체로 야구장에서 나는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대신에 당은 좀 끌어올려야겠다 싶었고, 랜필에서 극강의 뷰를 자랑한다는 버블티 카페 '더앨리'에 들렀다. 홈 플레이트 뒤 약간의 반지하 자리에 위치한 더 앨리는 와이드한 창으로 포수 바로 뒤에서 경기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러 기대를 품고 들른 더앨리의 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포수 바로 뒤라 포수와 투수, 타자의 움직임 뿐 아니라 대기타석에 서 있는 원정 선수들과 멀리는 더그아웃까지 잘 보였다. 타피오카 펄이 잔뜩 든 버블티를 하나 시켜 스툴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가만 바라보았다. NC의 리드 오프 아섭이 타석에 들어서 SSG 투수 맥카티의 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선 사실 그의 뒤통수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더 앨리의 창은 뿌연 필터 같은 게 처리돼 있는지 바깥 풍경이 자색으로 보여서, 황야의 서부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러분, 랜필에 오시거들랑 '더앨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광고 아님 내돈내산)
이날 나의 자리는 3루 의자지정석으로 23블록 두 번째 열이었다. 개인적으로 3루 23블록의 앞 열은 추천하지 않는다. 랜더스라이브존이라고 하는 포수 후면석이 전진 배치돼 있는데, 그쪽 난간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무조건 앞열이라고 해서 시야가 좋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고척과 더불어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문학이었다. 주중 문학에는 NC의 응원단인 랠리 다이노스가 오는 일이 없는데, 그 바람에 '한줌단'이라 불리우는 적은수의 NC 원정팬들을 이끌어 응원을 주도하는 '풀뿌리' 응원단장이 있었다. 도구리 박민우(아마도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유니폼을 입은 그는 '쩌렁쩌렁' 응원을 주도했다. 바로 옆 블록에는 한줌단장님 못지 않게 목청이 좋은 어린이가 생목으로도 열렬히 선수들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잠실이나 고척에 비하면 한줌도 아닌 반줌 내지는 반꼬집 정도 되는 규모였는데도 응원에 활기를 띠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늘 NC의 선발투수는 부상 끝 돌아온 스트롱베리, 이재학이었다. 사실 나는 그를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람 싸다구를 때리는 것 같은 그의 쓰리쿼터 투구폼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니 더욱 싸다구에 특화된 폼 같아서, 혼자서 끄득끄득 웃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아직 컨디션이 덜 올라온 탓인지 이날 재학의 공은 소위 '맛도리'였다. 홈런왕 레이스 2위를 달리는 최정이 나오면 으레 SSG 팬들은 "최정 홈런"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최정 홈런" 하자마자 최정이 이재학의 직구를 받아쳐 솔로포를 터뜨렸다. 다음 타자 최주환도 "최주환 홈런"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홈런을 쏘아올렸다. 선두타자 추신수 좌전 안타, 2번 타자 최지훈 3루타부터 시작해 불을 뿜는 SSG의 1~4번 타자들이었다. 일명 ㅊㅊㅊㅊ 라인. (추신수-최지훈-최정-최주환. 라인 이름은 내가 지었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두들겨 맞아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마운드를 지키고선 스트롱베리를 봤다. 고개를 떨구고는 한 동안 들 줄을 몰랐다. 아무렴, 나보단 그가 더 아프겠지. 하지만 나도 아프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없는 가난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이닝이 끝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재학의 고개도 한껏 수그려져 있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거북을, 응원석의 거북인 내가 가만 바라봤다. 거기에는 차마, 카메라를 들이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흑, 23블록 앞열은 뷰가 산란하다.
5회가 끝난 클리닝 타임. 나는 게이트 앞을 서성거렸다. 인스타그램으로 댓글을 주고 받던 또 다른 NC팬 O님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O님은 나의 짤들에 자주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NC팬이라는 이유 만으로 서로를 '팔로우' 했다. 댓글로 대화를 나누다 오늘 경기에 O님도 온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럼 만나자'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참이었다. (나는 어설픈 'E'인데 반해 아무리 봐도 O님은 완벽한 'E'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인스타 DM으로 이런 말들을 주고 받았다. '게이트 앞에 서 있을게요. 저는 원정니폼(원정 유니폼) 손아섭이에요.'(나) '저는 도구리(도구리 유니폼) 오영수요.'(O) 정말로 게이트 앞에 갔더니, 도구리 오영수(유니폼을 입은)가 한 마리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만나,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눴다. '딸기'(이재학 선수의 별명)를 보러 왔는데 계속 맞아서 안타깝다는 얘기, 자리가 어디냐는 얘기, 누구랑 왔냐는 얘기 등등. 나는 더 앨리에서 산 버블티를 한 잔 건넸고, 그는 내게 '아츄'(츄러스를 꽂은 아이스크림)를 사주었다. 지난 두산전 우취를 함께 겪었던 그는, 경기가 다시 배정되면 잠실에서 보자는 말을 남겼다. 나는 꼭 그러겠다고 했다. 우리는 남은 이닝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 나는 직전에 마신 생맥주 한 잔으로 불콰해져 있었다. O님과의 만남이, 더욱 아드레날린을 증폭시킨 경향도 있었다. 흥분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내 눈 앞에서 NC의 포수 김형준이 연타석 홈런을 날려대고 있었다. NC에서 포수는 보통은 박세혁이었고, 다음은 중열, 그 다음은 대온이었어서 이날 형준은 내 눈에 처음 본 포수였다. (물론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뽑힌 전력 등을 봐서 유망주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그가 1회 아웃카운트를 잡지 못한 중열 대신 급 교체되어 나오더니 연타석 홈런을 뻥뻥 날리고 있었다. 다른 포지션에 비해서도 유독 1군 무대에서 주전으로 뛰기까지 시일이 오래 걸린다는 포수라는 포지션. 거기서도 연차로 막내인 우리 포수의 화력이 이 정도구나 싶어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가 베이스를 도는 모습을 취한 정신에도 오래오래 지켜봤다.
8회쯤 울리는 SSG의 응원가 '연안부두'에 맞춰, 나는 외야로 건너갔다. 문학은 불펜이 외야에 있기에, 외야로 가서 투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싶었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이라 내가 좋아하는 클로저 이용찬은 나오지 않을 거 같지만, 어떤 투수들이 몸을 풀고 있는지 궁금했다. 외야는 처음이라, 거기서 보는 풍경이 궁금하기도 했다. 사람이 정말로 드문드문, 야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듯이 한가롭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적이 편안해졌다. 내야에서는 바락바락 응원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중 한 곳에 나도 자리잡고 저 멀리 마운드를 내다봤다. 마운드까진 보여도 홈 플레이트의 포수나 타자는 보일락 말락했다. 가장 가까운 것은 불펜 투수의 등이요, 그 다음으로 가까운 것은 좌익수 김성욱의 등이었다. 불펜에는 투수 임정호, 김영규, 송명기가 쭉쭉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가끔 불펜 문 쪽으로 가서 경기 상황을 지켜보기도 했다. 내야와 다르게 바람도 선선한 외야에 앉아 경기장을 바라보느라니, 투수의 피칭이나 타자의 타격 같은 것은 먼지 같은 일이고 외야 건너 오는 뜬공 정도는 되어야 '무슨 일이 생겼나' 하며 건너다 보는 정도가 되었다. 술김에 오른 얼굴의 열기를 내려 앉히기에 적절한 공간이었다. 화를 식히고 내야로 돌아오니 경기는 7-4, SSG의 승리로 끝나 있었다.
외야 관중석에서 내려다보는 랜더스필드.
야구장 내의 전쟁은 이로써 끝났지만, 나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부리나케 달려가 좋은 자리를 선점해 사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와 대치했던 그 곳, 으로 달려갔더니 2~3명의 팬들이 먼저 와 있었다. 버스 앞을 서성대는데 그곳을 지키던 가드가 말했다. "저쪽 지하주차장 쪽으로 내려가시면 펜스가 있는데, 거기서들 기다리고 계세요." 감을 못 잡고 엄한데서 서성거리던 내가 안타까웠는지, 이렇게 친절한 가드는 처음이었다. 그의 손짓이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 주차장과 연결된 경기장 입출구인 그 곳은 사람 키 만한 펜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펜스와 펜스 사이 두 뼘 남짓한 공간이 있어 들고 나는 선수들을 볼 수 있었다. 거북 마냥 긴 목을 가진 나는 빼꼼, 선수들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펜스와 펜스 사이 이런 틈에 고개를 내밀어 선수들을 쳐다보는 것이다.
오늘은 3연전의 마지막 날이고, 선수들이 마산 홈으로 복귀하기 직전인지라 씻고 밥 먹고 나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족히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 사이 옆에 선 다른 팬들과 대화를 나눴다. "누구 부르세요?" "저는 김주원 선수요." "저는 류진욱, 이용찬…" "저는 박건우 선수요." 선수들 출퇴근길을 지키고 서자면 으레 이런 동지애가 생겨서 서로들 원하는 선수가 나오면 목청껏 힘을 보태 불러준다. 그 곳을 지키고 선 사람들 가운데 내가 가장 성공 가능성이 떨어졌다는 데 포인트 만점을 걸겠다. (아무 의미 없다는 얘기다.) 왜냐면, 류진욱 선수나 이용찬 선수 둘다 퇴근길에는 사인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김주원 선수는 가장 오래도록 남아 사인을 해주는 선수로 유명했고, 박건우 선수도 '츤츤'대기는 해도 결과적으론 사인을 다 해주고 가는 유형이었다. '아까 중외길에 받아야 했어…' 라는 거북이의 자기 반성이 시작됐다.
40분쯤 지났을까. 이윽고 코칭 스태프들부터 선수들이 하나씩 걸어나왔다. 주차장 조명이 어둡기도 했고, 그 두 뼘은 지나치게 좁은 폭이기 때문에 선수들 식별을 위해 눈에 힘을 잔뜩 줬다. 류진욱 선수가 먼저 나왔으나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실패.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사이 옆에 있던 분이 말했다. "이용찬 선수 나와요!" "이용찬 선수님!" 왼손에 포토카드, 오른손에 매직을 들고 외쳤다. 그가 저벅저벅,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 걸음걸이는 '저벅저벅'이라는 말 빼고 다른 수사가 불가하다.) 내가 Y를 시켜 DIY로 만든 그의 포토카드, 그 좁은 공간에 그가 슥슥 사인을 했다. "슬기도 적어주세요." 더 좁아진 포카 위 공간에, 그가 간신히 '슬기'를 그려(?) 넣었다.
아니, 내가, 그에게, 퇴근길에 사인을 받다니! 로 달떠 있는데 앞으로 '슝' 캡틴(a.k.a. 손아섭)이 지나갔다. '그래, 나 캡틴한테 말 좀 붙여봐야겠어.' 나는 캡틴에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었다. 일단 이름을 부르고, 어느덧 쪼글쪼글해진 오늘의 티켓 뒷면에 그의 사인을 받았다. 그가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급히 붙들어 부탁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당황했지만, "네네, 그러세요~"하며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갔다. 아, 진짜 내 부탁 잊지 말아요. 캡틴. 다시 또 말씀 드리겠습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Y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의 무용담을 자랑스레, Y 앞에서 늘어놓았다. 문학은 와 본 적 없는 Y는 "우취 잔여경기 편성되면 꼭 인천에 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내 이름이 짜부돼서 들어간 포토카드를 오래오래 바라봤다. '오홍, 퇴근길에 웬일이지? 낮에 거북이처럼 서 있는 걸 버스에서 봤나?' 'N' 특유의 망상력을 굴려가며, 나는 또 1시간 30분이 걸려 집에 도착했다.
※ 장황하게 썼지만, 결과적으로 '사인 받는 필승의 방법'은 집요함과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랑'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캡틴에게 받은 사인. 감사합니다, 손 캡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