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연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들을 궁금해한다. 그 어떤 것 Something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되는지 모르지만 은연중에 Something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는 Someone을 알지만 알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앞서 이것이 어떻게 내 눈앞에 보이는 가를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다. 이런 접근법은 과거 이원화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는 나에게 인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많은 인연이 생겼다. 마치 분자처럼 그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었고, 나도 나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세상에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세상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나는 그들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들은 나의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나를 관찰하게 되었고, 나는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다. 마치 파동으로 존재하던 것이 무게감을 가진 입자가 된 것이었다.
그 인연이 무엇인가 생각하기 전에 그 인연을 어떻게 내가 인식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본다. 나는 나의 지인을 보며 보며 문득 이런 느낌이 든다. 나는 원래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오늘은 출장 중 45일 만에 처음으로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오늘 절에 갔다. 인연 혹은 타인에 대해 많은 종교들이 그들만의 사상적 기반이 있는데, 나는 불교의 교리를 좋아한다.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마음이 크다. 불교에서 인연은 카르마로 얽혀있다.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쩌면 지금 익숙하게 느껴지는 나의 아내와 딸이 나의 영혼 깊숙한 어딘가에 각인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나에게 언제든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마치 정말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 책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을 읽은 적이 있다. 죽음 뒤의 삶이 있는가 없는가에서 1차적으로 구분되고, 죽음 뒤의 삶이 있다면 과연 그 삶은 어떤 삶인가에 의해서 또 구분이 되었다. 천당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환생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죽음뒤의 삶이 없다는 것은 지금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을 반복한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있었다. 누군가는 이 사실이 검증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적어도 검증되지 않았지만, 검증할 수도 없을 것이란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사후 세계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사후세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명할 때 동굴로 표현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난 아직 동굴에 있으니 동굴 밖의 세상을 보고 온 사람의 말을 들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정의되지 않은 마당에 동굴의 안과 밖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나라의 불교는 화려했다. 그것도 아주 어마어마하고 거대하게 화려했다. 그리고 이런 화려함 뒤에 쓸쓸함이 보였다. 전시된 불상의 손과 무릎, 발바닥은 칠이 벗겨졌다. 많은 사람들의 손이 그곳에 닿았을 것이다. 어떤 바람을 가지고 그 불상을 만졌을 것이다. 아주 간절했을 것이다.
부처는 살아생전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고집멸도로 표현했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집착을 버리면 고통이 사라지고, 집착은 팔정도를 통해 멸할 수 있다.
여덟가지 고에는 생로병사의 4가지 고통 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서 오는 고통,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하여 따르는 고통,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고통, 매순간 변화하여 정의할 수 없는 자신의 실체를 계속 정의하면서 오는 고통이 있는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부처는 집착을 버리라고 했지만, 불상 만지기는 오히려 이 집착을 심화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불상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옆에 있는 인연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 먼 타지로 오니 외로움이 쌓였고, 그러자 집착에 의해 나의 인연들을 힘들게 한 기억들이 떠 오른다.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다.
회자정리라는 말처럼 인연과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을 통해 깨달은 것들은 우리를 더 좋은 만남으로 이끌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