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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일희 Feb 17. 2024

‘즉·강·끝’말고 평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정욱식, 2023)


내가 사는 동네 인근 산을 20여 분 오르면 한강과 자유로가 시원하게 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 그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북한이 보인다. 개풍군이란다. 처음엔 저렇게 가까이 있는 게 정말 북한인가 싶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음의 거리와 실제 거리 간의 괴리가 크기 때문일 테다.      


이렇게 북한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보니, 안보 위기가 불거질 때마다 바짝 긴장되곤 한다. 이런 접경 지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대통령이나 국방부는 알고 있기나 한 건지, 긴장을 완화할 궁리는 내지 않고 “즉시 강력하게 끝까지 응징한다”는 자극적 멘트를 날릴 때면 울화가 치민다. 북이 도발하면 그 피해는 남북 상호 간 불가역적이다. 무책임하게 ‘즉·강·끝’을 외칠 것이 아니라, ‘최악의 시나리오’를 저지하도록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것이 최선 아닌가.      



2월 16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NLL을 유령선이라 일컫고 “해상주권, 무력으로 지켜야”한다고 일갈함으로써 또다시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는 지난 1월 남북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한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헌법에 명시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역대급 충격을 안겼다. 


‘주적’이라는 전쟁의 언어가 엄습한 것은 공포감뿐 아니라 완전한 단절감이었다. 밉든 곱든 지금껏 남한을 한 ‘민족’이라 칭해왔던 북한이 남한과 정말 ‘헤어질 결심’을 굳힌 것일까. 심난한 마음에 평화 연구자이자 북한 연구자인 정욱식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를 펼쳤다.  

    

도보다리의 추억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하 문재인)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하 김정은)이 도보다리에서 만나 ‘통일 밀담’을 나눴을 때 설레었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도보다리 회담 당시 문재인과 김정은은 동상이몽이었던 것일까? 훈훈했던 도보다리 회담이 저토록 증오 가득 찬 ‘주적’이라는 말로 내던져졌으니 말이다.   

   

책에서 정욱식은 문재인과 김정은의 동상이몽을 이렇게 해석한다. 김정은이 단계적 비핵화와 제재 완화가 동시에 이행되기를 앙망한 반면, 문재인은 평화협정을 비핵화 마지막 단계에서 추진하려고 했다. 이는 애초 두 영수의 방향이 완전히 달랐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차이가 좁혀지거나 확장되는 협상의 기술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어야 하는데, 남한과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거래할 무엇이 있긴 했던 걸까?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핵무기 연구소 전면적 가동 중단과 핵물질 생산 시설의 불가역적인 폐쇄”로 단계적 비핵화를 제안하며 제재 완화를 간절히 요청했지만, 트럼프는 통 넓은 협상을 벌일 듯 떠벌린 것과 달리 ‘선 비핵화 후 제재 해결’이라는 원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기차를 타고 2박 3일 4000km를 달려간 김정은의 애타는 마음은 기각됐다. 김정은의 입장에선 빈손으로 귀국해야 하는 회담 결과로 인민들을 볼 낯이 없었을 터다.     

 

김정은이 남한·미국과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이 ‘하노이의 굴욕’에서 출발했다는 추측은 합리적이다. 자신으로서는 ‘영변 핵시설 완전 폐쇄’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는 미국의 완고함과 남한의 무력한 조력자 역할을 확인했을 테니 말이다. 회담 이후 트럼프는 약속한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지 않았고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도 없던 일이 되었다.   

   

이에 김정은은 병진 노선을 강력히 채택하며 핵 무력 건설과 경제 건설에 적극 나설 것을 천명했다. 2021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사병의 복무 기간을 남성 7년 여성 5년으로 줄이고, 경성군과 함주군의 대규모 공군기지를 ‘온실농장’으로 과감히 전환했다. 김정은이 대규모 온실농장 앞에서 찍은 사진은 ‘스마트 팜’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북한 인민들의 농업과 식량 계획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어떻게든 자력갱생으로 자급자족의 능력을 강화해 제재를 반전의 기회로 삼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이를 정욱식은 김정은이 경제제재에 대한 해법을 ‘제재 해결(Without Sanctions)’에서 ‘제재와 더불어(With Sanctions)’로 전격 선회했다고 본다. 김정은이 하노이 회담 후 “제재 해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허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북한을 대상으로 지속적 제재를 가해 압박하겠다는 미국의 전략은 오판이었다.      

북한에 대한 몰이해는 툭하면 불거지는 ‘북한 퍼주기 지원’이라는 레토릭에서도 드러난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고사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조차 2000년의 10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돈을 퍼주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불린 식량난에 대한 과도한 각인은 아직도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지만, 이 역시 오해다. 


2018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탈북주민 11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 북에서 하루 세끼 이상을 먹었으며 2015년 이후 결식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대북 지원을 받아 핵 개발을 하면서 기아 선상에 있는 북한 주민을 돌보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김정은의 병진 노선과 함께 북한의 외교도 광폭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는 것에 대응해 북은 중국 러시아와 긴밀해지고 있다. 지난해 북러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공조를 과시하고 껄끄럽던 중국과도 관계를 회복하고 있으며 이제 일본과도 정상회담을 준비 중에 있다. 



반면 한국은 중국을 멀리하고 미국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포탄을 우회 지원하는 등 경제 안보 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는 필자처럼 외교에 과문한 사람조차 의구심이 드는 균형 잃은 외교로 한반도 긴장 완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이냐에 정욱식은 남북 상호 간의 군비경쟁 동결과 평화협정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반도를 비핵지대와 평화 체제 구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에 평화는 없다는 것이다. 비핵지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무엇보다 남북이 군비경쟁이 아닌 군비 통제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한다.      


미 군사력 평가 기관인 Global Firepower에 따르면 한국은 이미 세계 6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북한에 비교도 되지 않을 억제력이다. 억제력의 중요성이 상호 간 피해 규모가 아니라 “침략자의 손익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고 볼 때, 남한의 억제력은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 군이 안보 딜레마에 빠져들어 막대한 예산(60년간 900조)를 써가며 군비경쟁에 몰입하자 북한은 열악한 재정을 상쇄하기 위해 적은 비용으로 핵을 개발하게 되었고, 북의 핵에 위협을 느낀 남이 확장 억제에 매달릴수록, 미국의 부당 청구서를 남발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정욱식의 해법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변화된 북한에 대한 그의 안내서는 필독을 요한다. ‘즉·강·끝’은 사후 약방문일 뿐이다. 모든 것을 잃은 후 가루가 되도록 응징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한반도에 절대 다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직도 유효할까.     


끝으로, 이는 정욱식이 책에서 다룬 내용과 다른 차원의 얘기다, ‘새로운 북한’에 대해 남한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보고 싶다. 필자처럼 반공·반북 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에서부터 반공이 희미해져 ‘빨갱이’라는 말조차 어색한 세대까지, 북한을 얼마나 알고 있거나 알고자 하고 있을까?      


반공이 국시였던 세대의 북을 향한 주된 감정이 증오와 공포였다면, 젊은 세대는 이웃 나라 일본보다도 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을 만큼 문화적 유대가 약해졌다. 남과 북이 한 민족이었음을 확인시켰던 ‘이산가족 찾기’ 이벤트도 이제 대상 세대가 거의 사라졌다. 한 민족이었다는 마지막 증거라면 남과 북이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교류가 끊긴다면 남과 북의 언어가 정말 같은 언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서울대 통일연구원의 통일 의식 조사에서 드러나듯이 남이 북을 한 민족으로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매우 희미해져 버렸다.   

   

이런 마당에 통일 운동 진영의 슬로건은 여전히 같은 민족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과연 이런 통일 운동의 방향은 시민의 변질된 현실 인식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또한 같은 겨레로서의 통일이라는 목표가 이제 옛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북한 연구자 김성경의 제언처럼 이제 ‘투 코리아’라는 인식의 바탕에서 남과 북을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짧은 내 소견엔 통일의 이유가 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것도 이제 빛바랜 사진 같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 주민조차 내 이웃으로 올곧게 수용하지 못하면서 동질성을 어떻게 회복한다는 것일까. 나는 통일보다 평화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나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요구와 노력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6.25(한국전쟁)는 같은 민족이 아니어서 벌어진 전쟁이 아니다. 지금 일촉즉발로 불화하는 남북 두 체제에 절실한 것은 평화다. 어떤 자세가 필요할지 책을 펼치자. 각성한 평화주의자들이 많아져야 ‘즉·강·끝’의 허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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