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엿들은 적이 있다. 나는 본디 매우 밝고 낙천적인 성격이었으나, 6살에 엄마와 아빠의 이혼 이후로 많이 소심해지고 주눅이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주눅들고 소심한 성격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었는지 구체적인 예는 듣지 못했지만 나에게 그 말은 자명한 진실, 마치 의사의 진단처럼 들렸다. 그 말 한마디로, 수 년간 나조차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그리 희망적인 나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부터 나는 진짜로 소심하고 주눅들고 또 남들의 기분을 늘상 살피는 아이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이 느껴졌다. 아마 12살 혹은 13살, 그 언저리였다.
당시 그 말은 나에게 무척이나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신빙성 있게 들렸다. ‘주눅’과 ‘소심‘, 엄마나 아빠 입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나 아빠는 이혼 당사자기에, 그 피해자(?)의 입장이 된 나와 동생이 자신들의 이혼으로 인해 주눅들거나 결핍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었을테다. 그들의 입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었던 ‘이혼 당시의 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이모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러니 나에겐 얼마나 충격이고 또 믿을 만 한 증언이겠는가? 적잖은 충격에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던 나는 그 말에 묶이고 말았다.
꽤나 오랜 시간 나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상처로 인해 소심한 성격으로 변모한 아이 흉내를 냈던 것 같다. 흉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보니 내가 겪은 것들이 꼭 부모의 이혼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틀렸을 수도 있다. 애초에 소심해지고 주눅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혼은 분명 한 아이에게 크디 큰 사건이다. 이모가 맞았고, 아주 정확하게 나를 파악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당시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아가 넓혀지는 사춘기였고, 우연히 엿들은 이모의 말에 나를 꿰어 맞추며 오랜 시간 그 말에 스스로 묶이고 있었다. 때때로 의무적으로 우울을 찾아 들어가 시간을 보냈으며, 부모의 결정으로 맞게 된 상황을 비관하며 눈물을 짜내기도 했다. 그랬던 세월이 쌓여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추측이나 평가, 그런 것은 다 허상이고 나는 그냥 나 자체로 지금까지 성장해왔다는 사실만이 지금 내 앞에 놓인 현실이다.
이제 나는 의문이 든다. 타인이 나를 진단할 수 있을까? “너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성격이야.“하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 자신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람은 변하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변하고 있지 않을까? 나라는 존재는 나 자신도, 타인도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는 존재라는 답에 도착한다. 그러니 타인에 대해, -그 타인이 자신보다 한없이 어리고 연약한 존재라고 해도, 그에 비해 자신은 많은 경험과 예시가 있다고 해도, -함부로 그들을 정의하거나 평가할 수 없지 않을까?
나의 말이, 평가가, 정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겨우 나라는 한 예시가 지금도 성장하고있을 다른 인간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나의 언행에 묶여 괴롭지 않게 하리라. 조금은 우울했던 나의 유년기에 보내는 위로이자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