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사람은 믿어도 된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그 말이 나에게 유난히도 와닿았던 이유는 나를 낳은 사람도, 그래서 나도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것을 유난히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화면을 조금 놓쳐도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는 드라마를 틀어 놓고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일을 할때면 나는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런 일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때는 주로 주말 오전 같은 때다. 반지에 걸려 실밥이 늘어난 니트를 꿰메거나 겉옷과 마찰이 일어나 잔뜩 올라온 보풀을 제거하는 일, 신발 발꿈치에 걸려 밑단이 튿어진 슬랙스를 꿰메는 일, 헐거워진 자켓 단추를 단단히 여며 꿰매는 일. 나는 맛있는 간식을 아껴뒀다가 몰래 꺼내 먹는 아이처럼, 주말 아침이면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일감들을 꺼내 놓는다.
엄마는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다. 돌아보면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다 만들었던 것 같다. 커튼, 티 코스터, 식탁보, 이불 같은 생활용품부터 치마, 조끼, 바지 같은 옷까지 다 만들었다. 주로 내 옷을 많이 만들어 줬는데, 인형 옷 입히기 놀이처럼 만들고 입히는 재미가 있어서 그랬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맞춰서 입는 생활 한복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 옷도 단체 구매를 하지 않고 직접 만들어 입혔다. 노란 저고리에 까만 치마였는데 내 옷의 노랑은 친구들의 노랑보다 묘하게 옅었고, 옷감은 확연히 달랐다. 내 옷은 빳빳하게 힘이 없고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는데, 그때 찍은 단체 사진을 보면 빳빳한 기존 원단은 싸구려고 엄마가 만든 옷은 진짜 생활 한복 느낌이다. 언뜻 봐도 내 옷이 훨씬 예뻤다. 하지만 그때는 내 옷만 친구들과 묘하게 다른 그 느낌이 싫었다. 후들거리는 옷감 때문에 왠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마음을 엄마에게 불평할 때면 엄마는 ‘네 옷이 훨씬 더 예뻐.’라고 했지만 내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엄마가 만들어 준 옷이 지겨웠고, 어쩌다 밖에서 파는 옷이 생기면 그 옷이 무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노량진으로 올라가 자취방을 구했다. 분명 어딘가 칙칙한데 이유를 몰랐던 나는 커튼을 달아보기로 결심했다. (커튼이 문제가 아니라 북향이어서 칙칙했던 건데 그때는 그런걸 모르고 방을 구했다.) 나는 엄마에게 창문을 가릴 예쁜 커튼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머리를 맡대고 의논한 끝에 연보라색에 회색이 약하게 섞여 무슨 색이라고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 바탕색에 잔잔한 세모 무늬가 있는 천을 골랐다. 그 천은 곧이어 커튼이 되었고 북향이라 가릴 햇볕도 없는 창문에 안착했다. 그 볕도 볕이라고 3년을 지내다 커튼을 떼어보았을 때, 햇볕이 많이 드는 쪽은 약하게 빛이 바래있었다. 커튼을 뗐을 때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바랬다고 새 커튼을 다시 만들어 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그때만큼 와닿았던 때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커튼을 접어 이삿짐 박스에 싣는 내 마음은 많이 괴로웠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산다. 옷도 사고, 커튼도 사고, 식탁보도, 베개 커버도, 티 코스터도 산다.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은 아주 한정적이다. 겨우 단추를 달고 찢어진 구멍을 어설프게 꿰맬 뿐이다. 언젠가 재봉틀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현실로 옮기기가 쉽지는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배워 놓을걸 싶지만, 안타깝게도 한쪽만 바랜 커튼은 엄마의 유산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