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위로가 전혀 와닿지 않았다. 왜일까, 나는 왜 그의 말에 위로받지 못했나, 나는 왜 위로받아야 하는 상태였던가, 오늘은 약간은 길었던 그 성찰의 과정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지역을 옮기고 새로운 학교에 발령을 받았으나 시작이 순탄치 않았다. 발령을 받으면 모든 학교들은 전입 교사들과 함께 2월 넷째주에 신학기 출근 기간을 가진다. 그 때 한 학기동안 어떻게 수업을 꾸려나갈 것인지, 평가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등 대략적인 교육과정을 협의한다. 나는 소수교과라 대부분 전교에 한명, 많아야 두명이 같은 교과를 담당한다. 이때 동교과 선생님과의 궁합이 참 중요한데, 나는 지금껏 운이 좋게도 너무나 순탄한 동교과 선생님을 만나 편하게 학교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새로운 학교의 동교과 선생님과는 그렇지 못했다. 2월 신학기 준비기간부터 부딪혔다. 교과서도, 전년도 자료도 전달받지 못해 앞이 깜깜했던 나는 개학 직전 2월의 마지막 주에 여러차례 협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연락을 거부당하거나 나에게 일을 떠넘기기 일쑤였다. 화가 난 나는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싸움을 걸었다. 통화를 거부하고(밖이라며 번번이 거절당함)구렁이 담 넘어가듯 업무들을 나에게 떠넘기는 그 여자 (앞으로 김아무개라 칭하겠다. 김씨와 전혀 무관하다.)에게 대고 왜‘ 제가 하나요?’ 라고 말하며 그간의 불만들을 쏟아냈다. 김아무개씨도 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그의 언변은 가히 새롭고 신선하여 충격이었다. 당시 이 싸움을 치르던 나의 앞에는 남편이 앉아 있었고 나는 치솟는 심박수와 함께 열정적으로 타자를 두들겼다. 이것을 1차전이라 하겠다.
3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1차전을 치르고 난 우리는 서로가 껄끄러워 한 번도 대면으로 협의를 한 적이 없었고 최대한 사내 메신저를 활용했다. 하지만 동교과가 단 둘 뿐인 우리는 협의할 일이 지속적으로 생겼고, 업무는 새롭게 계속해서 생겨났다. 단 1%도 손해보고싶지 않았던 나는 김아무개에게 새롭게 내려오는 업무를 토스하고 김 아무개또한 나와 한 마음 한 뜻이라 무섭게 반발하며 이것은 당연히 당신이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주고받은 우리의 메신저는 패스트푸드점 영수증마냥 줄줄이 길어졌고, 그렇게 2차전, 3차전, 4차전을 거듭하길 한 달째, 나는 임신을 했다. 그리고 행여 아기에게 해가 갈까 싶어 나는 일방적으로 모든 싸움을 멈췄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휴전 상태가 이어졌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당시 나는 꽤나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스트레스로 임신이 안되면 어쩌지 걱정할 정도였다. 당시에 내가 쓴 일기를 돌아보면 김아무개씨와의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내 마음을 달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금요일 퇴근 직전에 전쟁을 치렀던 날은 ‘불금’의 자유를 만끽하지도 못하고 죽상이 되어 식탁에 앉아 남편에게 열불을 토했다. 남편은 이런 나에게 ‘겨우 그런 사람 하나 때문에 금요일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건 여보 손해야’하고 위로했지만 나라고 그 사실을 몰라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므로 다시금 남편의 위로는 전혀 와닿지 않는다고 되뇌이며 괜히 남편까지 미워지는 불행이 거듭되었다.
가장 큰 사건은 내가 병가를 내고 나서 터졌다. 그간 협의를 하지 않아 우리는 꽤 문제가 생긴 상태였고, 이를 바로잡기보단 나의 티끌을 온 세상사람들이 아는 것이 먼저인 김아무개는 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문제를 키웠다. 관리자들에게 가서 나의 문제를 보고하되 나와의 연락은 여전히 거부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울렁거리는 뱃가죽을 붙잡고 하루에도 몇번씩 관리자와 통화하며 이게 병가인지 재택근무인지 모르겠는 일주일을 보냈다. 다행히 관리자의 눈물나는 노력으로 우리는 협의에 극적으로 성공했고 나는 그냥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먼저 사과했다. (김아무개는 끝까지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많이 서툴었어요. 죄송해요.’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을 내뱉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더이상 괴로움을 잊어보려고 일기장에 자기 최면을 걸지 않아도 되었다. 역시 사람을 미워하는 일보다는 사랑하는 일이 쉽다. 그 편이 나에게 더 아름답다. 몸과 마음 모두에게 그렇다. 사실 내가 김아무개와의 전쟁을 거듭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사람이 떠넘긴 일이 많아서, 혹은 그 사람의 언행이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하나라도 손해보기 싫어서 그 사람에게 미루게 되는 나의 마음 상태와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더 열받을까 고민하는 나의 태도가 너무 못나보여서, 그것이 나를 가장 괴롭게 했다. 남편의 위로가 와닿지 않았던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다. 한 사람을 악으로 치부하고 단순하게 종이 접듯 감정을 접어버릴 순 없는 법이다. 그를 미워함으로써, 순수 악으로 정의 내림으로써 따라오는 부정의 감정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다. 그런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나는 너무도 복잡하고 민감한 사람으로서 그런 식의 위로에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는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2월 말부터 5월말까지였으니 장장 3개월의 여정이었다. 나는 분노하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미움보다 사랑이 쉽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나를 위로하는 방법은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 찾아지는 것이었다. 남편의 위로가 와닿지 않는다고 남편에게 서운해하지 않는 방법도 더불어 알았다. 참으로 값지다 할 수 있는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