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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지 Dec 12. 2019

민지 씨는 왜 글을 써요?

그런데 저 너무 취한 것 같아요.


Q. 민지 씨는 왜 글을 써요?

A.
꼭 글로 쓰고 싶은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글로 반드시 써야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알고 넘어가지는 것들요. 꼭 해야 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안 하면 그 개념에 집착해서 한동안 같은 문장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인상 깊은 게 있으면 그게 문장으로 남아요. 멋진 문장이 거창하게 짠 탄생하는 게 아니고 그냥 그때 생각난 문장이 그대로 둥둥 뜨는 기분이 들어요. 남길만한 가치가 있어서는 딱히 아닌 것 같고, 내가 남기고 싶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뿐이에요. 가치 있는 문장이 아니라고 한 데서 눈치챘겠지만, 글을 남기는 것이 내 소임이거나 숙명이어서는 아니고, 내가 하늘이 내린 문장가라서는 더더욱 아니고, 그냥 제가 수다쟁이기 때문이에요.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산만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요.

그러면 그냥 말해도 되겠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더라고요. 이미 많은 걸 과도하게 말하면서 산다고 생각해요. 말이 무서운 이유는 청자가 지정되잖아요. 내 눈 앞에서 내 눈을 맞추고 있는 사람한테 "아, 나는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뿐이지 너한테 하는 말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마."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도 너무 말하고 싶은 게 생겨요. 내가 그것에 대한 생각이 강렬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요즘 동일한 주제에 대해 문장들이 떠오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이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정리되는 순간이 있거든요. 특히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주제가 중복되는 시기에 그런 일이 많이 생기지요. 내가 요즘 이 얘기를 되게 많이 하는 것 같다 싶은 것요. 그러면 그 기억을 꼭 정리해보고 싶어요. 그러면 글을 써요.

방금 제가 말하고 싶어서 쓴다고 했잖아요. 어떤 생각이 한 줄에 꿰이면 글로 남기고 싶다고도 했고요. 그게 꼭 장문으로 된 글로 남게 되는 이유는, 그게 짧은 말이나 한 줄의 글일 때 누굴 상처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착해서가 아니라 오해받고 싶지 않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미움 받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내 머릿 속에 어떤 생각으로 마무리가 된 것뿐인데, 그걸 짧게 쓰거나 말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상처 받는 사람이 생겨요.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친구가 ‘야, 여기 인생 맛집이다.’ 하고 데려간 집이 맛이 없었어요. ‘함부로 인생 맛집 소리 하면서 누굴 데려가면 안 되겠다. 그 말 자체가 괜한 기대감 때문에 이 집의 맛을 후려치게 만든다.’라는 문장을 제가 어딘가에 말하거나 썼다고 생각해봐요. 그것도 제 이름을 달고요. 최근에 나한테 자기 인생 맛집을 굳이 소개하고 데려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요. 저격당한 기분이 들겠지요. 그런데 제가 그 문장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최근에 누군가 인생 맛집이랍시고 저를 데려갔던 집이 드럽게 맛이 없었기 때문, 그 이유가 아닐 확률이 훨씬 높아요. 실제로 제가 그 말을 엄청 하면서 친구들을 데리고 다녔거든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친구가 소개해준 맛집을 가봤는데, 너무 기대를 하고 가선지 생각보다 별로예요. 물론 맛없진 않았지만 '인생 맛집'까지  갈 일인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주마등처럼 스치는 거예요. 내가 인생 맛집이랍시고 지금까지 데리고 다닌 친구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겠다. 그냥 조용히 데려갔으면 더 즐길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나는 이런 집에 왔을 때 꼭 너랑 함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여기 엄청 맛있는 집이라고 극찬하면서 시간과 정성을 쪼개서 애정을 표현한 건데 그것 때문에 이 친구가 나만큼의 기쁨을 못 누린 건지도 몰라. 동시에 나를 ‘인생 맛집’에 데려갔던 친구도 그런 마음으로 나랑 동행했으려나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도 들어요. 그런데 내 기대에 못 미친 것도 사실이에요. 물론 그건 너무 기대를 심하게 한 제 탓이지만요. 그런데 제가 여기까지 생각한 시점에서, 제 실명으로 느닷없이 인스타에 ‘인생 맛집 소리 하면서 누굴 음식점에 데려가는 게 오히려 역효과일 때가 많은 듯.’ 같은 말을 썼다고 생각해봐요. 근 한 달간 나랑 밥 먹은, 그중에서도 좋다는 데 데려다준 많은 사람들을 상처 주게 되지 않겠어요? 그 고마운 사람들을 저격한 게 되지 않겠어요? 글이 짧다는 것, 내 실명이 오늘 날짜에 그 짧은 글에 가 붙는다는 게 갖는 위력이 이렇게 큰 거예요.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 과거에 제가 겪었거나 한 일이 줄줄이 구슬 꿰듯 연결되면서 어떤 인상으로 남으면, 꼭 그걸 쓰고 싶어져요. 가능하면 긴 글로요. 내 머릿속을 뛰어다는 이야기들을 실체화하는 것이 재미있고,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공감이나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글자 그대로 ‘알아’주면) 좋겠다는 본능이 있고, 이왕이면 한 명 이상이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관종끼 같은 것이 합쳐져 긴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돼요. 그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재미있어요. 두툼한 스키 장갑으로 더듬대던 무언가를 내 생 손으로 꽉 잡고 주물럭대는 기분이 들어요. 그게 멋진 것이든 촉감이 좋은 것이든 상관없어요. 무디게 느끼던 무언가를 실체화시켜서 마음껏 주무른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촉감이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순간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1초 지나면 과거가 되는 내가 그 순간 느낀 감정이 글로 남는 거예요. 내 글이 내 정체성도 아니고 내 인생철학도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더더욱, 실명으로 내 말이 누군가의 면전에서 펼쳐지는 게 너무 엄중하고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최근에 익명으로 글을 썼고, 내 이름이 걸리지 않은 계정으로 글을 쓰기도 해요. 그 기분이 좋았어요. 그게 진정한 나여서는 물론 아니지만, 내 실체가 실체화되지 않은 상태라는 게 좋더라고요. 내 이름이 없으니 나와 직전에 밥을 먹은 사람도, 나와 어제 통화한 사람도 없어요. 내 글이 올라왔을 때 내 이목구비와 내 생활 반경을 떠올리지 않아도 돼요. 그것만 없어도 글이 가벼워져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았어요. 사실 제 이름으로 글을 쓸 때는 모든 글 말미에 항상 추신을 달고 싶거든요. 여러분, 이 글은 최근 만난 특정인을 향해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의 오랜 실수를 관찰하면서 깨달은 재미있는 기록입니다-라고요. 맞잖아요, 내가 무수한 사람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듯 내게 떠오른 문장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끼친 영향의 퇴적물이겠냐고요. 그런데 그 문구 자체가 또 특정인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될 것 같아서 그만둬요. 그래서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항상 즐거운 동시에 후회를 해요. 종이로 남는 책을 어려워하는 것은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익명으로 하는 독립출판은 기명의 기성 출판물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작업이에요. 물론 그 독립출판물을 내가 썼다는 사실 역시 친한 사람들은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이름’이 갖는 권위는 크기 때문에, 내가 그 필명을 쓰고 싶던 시기에 쓴 글은 시간이 지나도 그 필명이 한 일로 머무를 수 있어요.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어요. 내가 곽노열 정명자의 딸이며 곽민아의 동생이지만 일할 때는 그 세 사람을 떠올리지 않고 곽민지 작가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요. 내 가족관계는 영원하고 명확한 것이지만 그게 제가 다른 활동을 할 때 제 마빡에 가 붙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엄마 아빠의 딸이며 언니의 동생으로는 못 할 일이나 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가진 모든 옷은 내 옷장에 있지만 그날 내가 원하는 것만 장착하고 일을 하러 활보하는 거지요, 모든 옷을 껴입은 상태도 전라도 아닌, 내가 선택한 상태로요.

그래서 글을 써요. 그런데 저 너무 취한 것 같아요. 내일의 저도 동의하면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놓을게요. 지금은 저장만 해 두고요. 다 옮기니 분량이 너무 기네요. 뭐 하나 질문했다고 세 페이지씩 떠들어제끼는 사람들은 지가 그만큼 떠들었다는 사실도 모를 거예요. 알았으면 그렇게 지 혼자 그렇게 연속으로 지 얘기만 떠들 리가 있나. 아, 이 말들은 쓰지 않을 거예요. 저에게 신나게 여러 가지를 떠들어대준 최근의 사람들이 저격당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나는 그냥 내가 방금 오지게 말이 많았다는 걸 인지하고 한 마디 남기고 싶었던 것뿐인데. 말이 너무 많지요? 큰일 났네. 이거 아무도 안 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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