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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Sep 20. 2022

Vostok` 시작도 끝도 여름




도무지 여름은 무언갈 쌓아두는 일이 없다. 


봄이 꽃잎을, 가을이 낙엽을, 겨울이 눈을 쌓아두는 동안 여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소멸시킨다. 여름의 더위는 초록을 만들고, 땀을 흐르게 하고, 우리의 보폭을 넓히지만 곧바로 여름의 장마는 초록을 덮고, 땀을 식히고, 우리의 보폭을 좁게 만든다. 미련도 후회도 남기지 않는 여름을 사랑하지만 내가 담아두지 않으면 모든 게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사진을 쌓아뒀다. 조개껍질을 모으듯 부지런히, 신중히 주워온 사진들로 나의 여름을 완성했다. 그 여름으로 다른 계절을 날 것이다.



사진은 계절을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다. 


여행지마다 나를 따라오던 비의 지독한 짝사랑 때문에 여름의 장마를 끔찍이 싫어하던 내가 비가 오길 기다렸다. 날마다 구름을 살피고 일기예보를 봤다. 비가 내려도 부슬부슬 오는 날엔 비가 사진에 담기지 않아서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도시 곳곳이 물에 잠기던 날 나는 처음으로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그날 찍은 사진은 내가 여름의 장마를 사랑하는 데에 충분했다. 어쩌면 내년의 장마가 기다려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의 피해를 가져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여름이 가면 끔찍이도 추운 겨울을 눈이 오길 기다리면서 나겠지.



여름은 입하가 지나면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각자가 계절을 실감하는 때는 제각각이다. 누구는 전기장판을 넣을 때, 누구는 길거리에 장미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누구는 반팔을 꺼내 입을 때 느끼는 것처럼. 내가 여름을 실감할 때는 매미소리가 들릴 때, 그리고 내 사진에 바다가 나오기 시작할 때이다. 산책로였던 모래사장은 여름이 오면 공원이 되고, 바라보기만 했던 바다는 사람으로 가득 찬다. 그래서 여름에 찍은 바다 사진은 사람도, 색도, 소리도 많이 담긴다. 내 사진에 그런 '선명함'이 담길 때 여름이 온다. 


여름은 무슨 색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는 초록색과 파란색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의 여름 사진을 보며 여름의 색은 '선명함'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어떤 색이든 여름과 만나면 뚜렷해진다. 나는 그 선명함과 그 선명함이 다시 사라지는 여름의 무상함을 부지런히 담았다.




좀 더 자라면 이곳을 지루해할까. 그러면 또 떠나야 하려나. 하지만 더 더 자라면 돌아오고 싶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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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흩뿌려진 벚꽃 잎이 새카매질 때까지 밟아가며 등교와 하교를 반복하다 보면 여름이 되었다. 동복과 하복을 번갈아 입으며 어른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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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이루는 것은 오로지 거침없은 생명력인 줄 알았는데, 그전에 추락하여 죽는 것들이 많았다. 죽어서 다음, 또 다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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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가 있어 여름은 초록이다. 여름이 아름다운 이유가 청신한 초록에 있다면, 이 비도 사랑받아야 마땅하다.



<VOSTOK - 시작도 끝도 여름> 22.09.11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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