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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뚝배기 Oct 15. 2021

그냥 마음 가는대로 이해하기

몇 년만에 '중경삼림'을 다시 보며

영화 '중경삼림'을 처음 보고 느꼈던 감정은 두 가지였다. 영화가 가진 미장셴과 이미지의 아름다움, 그리고 뭔지 모를 에피소드속 느껴지는 도덕적 불편함. 


불편함? 이 명작의 어디에 불편함이 느껴진단 거지? 아마 이 영화를 무척 감명 깊게 본 분들은 대뜸 이렇게 말할 가능성이 높다. 맞다, 분명 '중경삼림'은 훌륭한 영화다. 깊이 있는 의미와 해석들, 당시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는 영화적 표현들, 자칫 낭만적으로만 여겨질 수도 있는 세기말 분위기와 함께 삽입곡 '캘리포니아 드리밍' 은 한데 어우러지며 화룡점정을 이루고 있다. 


< 중경삼림 - California Dremin >


하지만 모두가 궁금해 하는 것은 그게 아니니, 이야기를 계속 하자면 이렇다.


시작은 대학교 졸업반에 다다랐을 무렵 '금성무'의 광팬이었던 친구의 추천이었다. 당시 처음 접했던 '중경삼림'은 관객이기 전에 영상을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으로서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독특한 촬영 기법, 미장셴, 툭툭 끊어지는 프레임 사이로 보이는 독특한 색채의 배경은 시쳇말로 '예술뽕'에 빠지기 딱 좋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이미지의 아름다움 뒤에 남아있는 불편함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영화 전반에 설정된 이별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감정의 변화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된 '주거침입, 약물" 과 같은 일련의 장치들에게서 그런 감정을 더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치 범법 행위를 사랑이란 허울 좋은 명목 하에 잘 포장해놓은 것 처럼 보였다. 



< 중경삼림 리마스터링  >


꽤 핵심을 찌르는 생각이 아닌가 싶었지만 재밌게도 나의 이런 편협한 관람평은 친구들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보였는지 줄곧 '프로불편러'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거장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하겠냐며 위로했고 이내 머릿속에서 기억을 뱉어내려고 애를 썼다. 간혹 술자리에서 누군가 '중경삼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애써 이야기를 피하거나 잘 모른다는 식으로 둘러대곤 했다. 구태여 이상한 사람 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기어코 '중경삼림'은 내게 같은 고민을 한번 더 쥐어주었다.


올 3월쯤, 지인들끼리 이용하던 넷플릭스 서비스를 해지하고 다 같이 '왓챠'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던 시기였다.이게 무슨 우연이었는지 왓챠에서는 재개봉한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을 서비스하고 있었고 몇 년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던 나머지 다시 한번 '중경삼림'을 보고야 말았다. 


어떤 새로운 감정이 들었다던지, 그런 것은 없었다. 단지 처음 봤을 때 보단 편하게 보려고 노력했는데 문득 어릴적 학교를 다니며 배웠던 문학작품 속, 시적허용이니 하는 일련의 장치들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예술적 표현을 위해 우리가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그것들. 


그렇게 바라보니 조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혹은 책들을 통해 보는 '사랑, 꿈, 희망'과 같은 감정이 가지고 있는 힘이 대단한 것 처럼, 개연성 없이 이루어지는 행동들, 경찰 633이 묵인하고 넘어가는 일련의 행동들 역시 서로가 시나브로 사랑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였다고 판단하면 이상할게 없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다, 누가 봐도 어딘가 개연성이 부족하고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부분이라면 제작자들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터, 해석의 여지가 있는 예술의 영역으로 두고 싶었다던지,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그대로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더욱이 고독, 우울, 낭만, 새로운시작,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그 과정을 평범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엮어나갔다면 관객은 납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보이는 그대로 감정을 따라가다보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가장 쉬운 정답에 도달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술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흡수도 필요한 법인 것 같다.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기도 하지만 대로는 과해석 보다는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 그대로에서 주어지는 감정이 답인 경우도 있는 듯 하다. 


마크 로스코와 그의 작품


마치 현대 미술의 '마크 로스코'의 작품 처럼 굉장히 추상적이고 거대한 이미지 하나 밖에 없지만 각자가 느끼는 감정이 천차만별인 그림을 보듯이, '중경삼림'을 보고 누군가는 아름다워하고 추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나름 건방진 생각으로 작품을 생각해봤지만 역시 오랫동안 각기 다른 세대에게 사랑 받는 것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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