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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Dec 18. 2019

두 개의 섬 6화

무지개와 환상에 대하여

무지개와 환상에 대하여




온천에서 도시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는 내내 이야기에 시달렸다. 옆자리에 우연히 같이 앉게 된 아주머니께서는 같은 나라에서 온 여행객을 마주친 기쁨에 그에게 끊임없는 말을 건네었다. 딸의 대학 진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집값 폭락이나 보수정당 지지에 대한 의견까지, 아주머니는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로 그의 인생의 두 시간을 낭비하셨고 결국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내려야 해서요."

"벌써 가 학생? 여기가 어딘데?"

"안녕히 가세요."


그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어찌 보면 무례한 작별을 한 것은 물론 시종일관 반복되는 반말과 불쾌한 질문, 덧없는 이야기에 질렸던 탓도 있지만, 그 질문을 대답할 수 없었기에 무시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피곤함을 피해 무작정 도망쳤기에 이곳이 어딘지 작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고, 불쾌함에 쫓겨 내린 장소 치고는 아름다운 곳에 내렸다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아침에 창공을 뒤덮던 먹구름은 햇살의 눈빛 속에 부수어져 조각구름이 되어있었다. 그 조각구름이 흘린 눈물 사이로 빛이 영글자 무지개가 수줍은 자태를 드러냈고, 그는 조금 경탄을 머금을 수 있었다. 마치 이 세계의 현실과 저 세계의 환상을 이어주는 것 같은 자태로 무지개는 그 고운 다리를 이름 모를 도시의 지평성 위로 드리웠다. 


참 오랜만에 보는 무지개였다. 그가 살던 도시는 대기 중에 매연과 미세먼지가 짙어 좋은 날씨 같은 것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꿈꾸고 환상을 즐기는 사람들 마저도 사라져서 무지개를 소망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무지개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그가 읽은 동화 속엔 무지개 끝에 숨겨진 황금의 항아리를 찾아서 영원한 여정을 떠났던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무지개의 끝을 따라 세상을 걷고 또 걸었고, 결국 평생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 자신이 출발했던 작은 마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이 이야기에 지구는 둥글다는 보편 상식 말고도 몇 가지 쓸모 있는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세상 모든 여행객들은 그렇듯 본질로 돌아간다. 기차에서 만났던 아주머니와 무지개를 쫓는 소년은 사실 그렇게 다르지도 않았다. 한쪽은 자녀의 성공과 아파트값 상승을 통한 부귀영화를 꿈꾸고 한쪽은 몽매한 환상과 황금을 쫓기는 하지만 어쨌든 닿을 수 없는 환상을 쫓는다는 면에선 그리 다를 바도 없는 셈이다. 그리고 꿈이라는 것은 닿아보지 못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소년이 무지개의 끝자락을 기어코 잡았더라도, 그 아주머니의 딸이 명문대에 가고 아파트 값이 10배로 뛰었더라도 그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에 닿은 순간에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더 큰 욕심에 사로잡히거나, 살아야 할 이유를 잃지는 않았을까. 꿈의 끝에는 행복이 있을까? 여태까지 살면서 수백 번의 꿈에서 깨어본 그였지만, 그 끝에 행복이 있다고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계속 걸었다. 그는 알 수가 없을 때면 무조건 걸었다. 사람의 섬을 찾는 그 역시도 무지개를 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무지개를 쫓는 삶을 살기에 무지개를 따라 걷는 것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슬과 햇살이 반반 섞인 길을 걸으며 그는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은 언뜻 기억해 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그의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여행을 좋아하는 달이가 해줬던 이야기였다. 그는 친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항상 존댓말로 점철되어있는 달이와의 즐거운 대화를 돌이켜보았다.


"겨울의 섬에선 그 작은 운하가 있는 마을이 가장 좋았어요. 시간이 나면 꼭 들려보시길 추천해요!"

"어떤 점이 좋으셨는데요?"

"음..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서구 도시들의 고풍스러운 매력도 있고, 황량함도 머금고 있어요. 조용하고 예쁘기도 하지만, 길거리에서 맛있는 거를 파는 사람이랑 먹는 사람으로 북적거리기도 하구요."

"관광객이 가기엔 좋은 도시겠네요."

"제 설명이 이래서 그런데, 직접 가보시면 조금 다른 느낌을 받으실지도 몰라요. 사실 여행은 가는 사람에 따라서 보고, 얻고, 느끼고, 가져오는 것이 다르니까요."

"가져오는 것도 중요한 거였어요?"

"그럼요! 그곳에서 파는 물건들, 그곳에서만 찾을 수 있는 보물들, 그곳의 사람들만이 들려줄 수 이야기들을 가져오면 좋죠. 그 도시에선 바다 가까이서 사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부대끼며 따스한 삶을 만들어나가는지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운하도 있는데 마냥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기도 좋고요. 아! 그리고 운하 끝자락에 있는 오르골당! 오르골당에 꼭 들려보세요. 음악이 물길을 따라 흘러서 산뜻한 생각이 많이 찾아들어요."


달이의 설명은 확실히 매력적인 부분이 있는지라 그는 그때도 그 도시를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운하의 도시를 가볼 것'이라고 공책에 메모를 했었다. 그 소망이 이렇듯 기차에서 뛰쳐내려 무지개를 쫓으며 걷는 기묘한 방식으로 실현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그리곤 그는 무지개의 끝자락에 걸려있는 운하를 발견하고 탄성을 내지를 수 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운하는 소담한 돌들과 바닷바람에 물든 오래된 가로등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장소였다. 물은 급할 것 없다는 태도로 서서히 흘렀고, 가로등과 가로수에는 참새와 갈매기가 번갈아 앉았다. 그는 귀를 기울여 상류에서부터 흘러오는 오르골 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오르골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바람소리마저도 노랫말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낭만적인 장소는 그 혼자만 만끽하도록 주어진 것은 아닌지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걷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참 묘한 것이라 무지개를 만끽하고는 싶어도 비구름이 무섭기는 했는지 저마다 형형색색의 우산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똑 닮은 빨간 우산을 두 개 들고 있는 한 연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저럴 거면 그냥 우산을 하나만 사서 같이 쓰지 왜.


한 때는 그의 꿈이 누군가의 연인이 되는 것이었던 적도 있었다. 사랑받는 것은 그의 영원한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사랑은 받아질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영원불멸하는 것이고 존재의 빈 조각을 끼워 맞추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것은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가 얻은 것은 마음의 상처들 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과 함께 사랑하는 것이 서로 다른 일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그가 품었던 사랑에 대한 환상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어려우며, 고독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 뒤로 그는 함께 살기를 꿈꾸면 꿈꿨지 함께 사랑하기를 꿈꾸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낭만적이고 사랑이 싹틀 것만 같은 도시에서 그는 생각했다. 이 길을 걷는 모든 연인들의 꿈도 어쩌면 환상인지도 모른다.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의 소망도 어쩌면 환상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은 꿈꾸기에 존재하지만 꿈을 꾸기에 그 무엇에도 닿을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의 고민은 사람들의 사랑과 삶처럼, 그리고 운하의 물과 무지개의 빗방울처럼 흘러 어디론가 계속 사라져 갔다. 언젠가는 다시 의미가 될 테지만, 그곳에선 이미 흐르는 것 자체로 의미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7화에서 계속.


매주 수요일 토요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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