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에서 고려시대까지
나 어릴 적, 아버지는 돈을 벌어 부동산 재테크를 하셨다. 나는 부자아빠 덕에 평생 편안하게 살 줄 알았는데, 신은 나에게 아주 큰 선물을 주셨다.
시련의 선물....
내가 돈을 막 써야 할 시기, 그러니까 성인이 되면서 우리 아빠는 땅을 팔기 시작했다. 그 땅 중에 하나가 지금의 광주 신창동 유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아빠는 발굴 이전에 땅을 팔아 어려움을 간헐적으로 해결하셨지만 큰 충격을 받아 지병을 얻으셨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뒤로하고 아빠의 땅이 유적지로 지정된 이유를 오늘 이야기하려고 한다.
광주 신창동 유적지는 영산강 유역 낮은 평야지대에 자리한 초기 철기시대 못 터, 토기가마터, 독무덤(옹관묘) 등 고대 농경문화와 생활유적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독무덤 안에서 토기와 철기류 유물이 출토되어, 이 지역 독무덤은 영산강 유역 삼국시대 독무덤 계보가 선사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가치가 크다.
그렇다면, 약 10만 년 전, 남도에서는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어떠한 방법으로 음식을 만들었을까? 당시의 생활상이 어떠했는지 역사적으로 고찰해보자. 1)
신석기시대 초기 식생활은 수렵과 어업으로 이루어졌다. 사냥과 채집, 이동생활을 하며 식량을 구했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식생활은 농경을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신석기시대 토기는 남해안 일대의 패총유적에서 주로 확인되었는데, 여수에서는 돌도끼, 경도패총, 무문양토기, 안도패총 등이 발견되었고 신안에서는 대흑산도 패총, 가거도 패총, 완도에서는 여서도 패총 등이 발견되어 그 시기 식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다. 2), 3)
고대시대는 영산강 일대의 풍부한 자연환경으로 철기 농경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토기 및 가마터 등이 발굴되면서 그 안에 밀, 보리, 오이, 참외 등 각종 씨앗, 농기구 및 생활 용구 등이 출토되었다.
전남 중서부지역은 소국 연맹체인 마한이 존재하였다. 지금의 나주 등의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번성하였고 이후, 백제의 성장과 함께 통합되거나 흡수되었다.
6세기 전반까지는 전남의 일부 지역이 가야 문화권에 속하기도 하였고 6세기 후반부터는 백제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백제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영산강 유역에 거대한 분구가 있는 대형 옹관 고분을 통해 그 시기 식생활은 철제농구가 보급되어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 생활이 정착되면서 식생활이 다원화되기 시작하였다. 4)
삼국·통일신라시대 남도는 백제의 본거지로 농경 중심의 식문화가 본격화되었다. 무등산과, 지리산 자락, 영산강 유역, 나주평야, 순천만 일대와 남서해안의 식자원을 바탕으로 식문화는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반상차림 기본형태가 일상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의례 음식으로 떡, 술, 식혜 등이 이용되면서 일상 음식과 의례 음식이 나누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국가의 형성과 함께 계층적 식생활을 완성해 간 시기로 신분제도가 도입되어 귀족식과 서민식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외국과의 교류로 828년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다 지리산에 심은 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이 한국의 차 본고장이 되었다. 5)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흥덕왕 편』
그 무렵, 남도음식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젓갈문화 발달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최초 젓갈 김치에 사용한 자하젓(김동젓)도 남도지역에서 생산되는 자하를 사용하였고 서남해안에서 잡힌 젓새우를 타 지역에 공급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한반도 발효문화 확대에 기여하였다.
“우리나라 동해에는 새우가 없다. 새우를 소금에 담가서 젓을 만들어 팔도에 흘러넘치게 하는 것은 모두 서해의 젓새우이며 속칭 세하라 한다. “
『난호어목지』
고려시대는 권농정책, 숭불정책으로 관료제도 발달과 불교적 분위기가 심화된 시기이다. 숭불정책으로 채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었지만, 몽고로부터 설렁탕이 들어오면서 점점 육식으로 변화되었다.
배를 만드는 조선 기술의 발달로 배를 이용한 수운 교역으로 남도의 식자재 공급이 활발하였다.
2007년 충청남도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 고려시대 무역선으로 추정된 난파선이 발굴되었다. 고려시대 전라남도 나주, 해남, 장흥에서 거둔 곡물을 개경으로 운반하던 곡물운반선으로 추정된다.
2009년 4월 27일부터 11월 15일까지 마도 구역에 대한 수중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고려시대 선박 1척과 곡물, 도자기, 죽제품, 목간, 죽찰 등을 인양하였다.
특히, 화물 운송표로 쓰인 목간과 죽찰 69점이 수습되었는데, 고려시대 죽찰이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 최초였다.
발굴된 목간과 죽찰에는 정묘, 무진 등의 간지와 날짜가 적혀 있어 유물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물표의 내용으로 보아 화물의 발신지는 장흥, 해남, 나주 지역이었는데 발신자의 직위와 성명을 구체적으로 적은 것도 있었다. 수신자는 개경에 있는 관료로서 관직명이 뚜렷이 적혀 있었다.
목간과 죽찰에는 지방에서 개경으로 보내는 벼, 조, 메밀, 콩, 메주와 같은 곡물류와 고등어, 게, 젓갈 등 해산물 품목이 적혀 있었는데 출토된 물품이 목간과 죽찰 기록과 대부분 일치한다. 6)
태안 마도 1호선에서 발굴된 유물은 선체를 포함해 벼, 조, 콩깍지, 메밀 등 다량의 곡류가 발굴되었으며, 젓갈을 담았던 도기 30점가량 출토되었다.
선적된 도자기는 대부분 고려청자와 젓갈 등 지방의 특산물을 포장하기 위한 도기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또한 벼와 쌀, 콩, 조, 메밀 등 곡물은 물론, 메주와 여러 가지 젓갈도 실려 있어 고려시대 사람들의 식생활 문화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 전국 12개 조창(漕倉) 가운데 영산강 유역에는 해릉창(海陵倉)과 장흥창(長興倉) 2곳이 있었다.
영산강은 용수 용수로서 영산강 유역의 농토를 기름지게 하였고, 수운로가 되기도 하여 15세기 전국 최초 장시(場市)가 열려 유통경제가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영산포장은 전남의 음식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고려시대는 고려청자의 발달이 식생활의 품격을 한층 높여 주었는데, 밥과 국이라는 기본 상차림 구조가 정착이 되었고 일상음식, 혼례와 제례음식, 다과상, 잔칫상, 시식과 절식 음식 등으로 음식문화 구조가 확립되었다. 7)
1) 국가유산포털
2) 한국민족 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4) 광주박물관 2018년
5) 차경희(2003), “[屠門大嚼]을 통해 본 조선중기 지역별 산출 식품과 향토음식,” 한국식 생활문화학회지, pp 379-395.
6) 태안 마도 1호선 수중발굴조사 보고서(2010),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7) 표인주(2013), 「영산강 민속학」, 민속원 pp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