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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Feb 18. 2021

어른이의 세계


어린이 대공원을 다녀왔다. 어렸을 때 간 적은 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으니 이번이 처음으로 다녀온 것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엄연한 성인이 되고 난 지금에서야 어린이 대공원을 찾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나들이를 나와 있었다. 어른들은 어린이를 챙기기 위해, 어린이는 어른을 챙기기 위해 서로 바빴다. 어른들은 길을 안내해 어린이에게 동물들을 보여주려 하고 어린이들은 동심의 눈으로 숨어있는 동물을 찾아내 어른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이들의 호흡을 보고 있으니 참 재미났다. 동물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박식한 어른들도 숨은 동물 찾기에는 형편없구나.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찾아낸 동물들의 모습을 보며 어린이보다 신기해하고는 했다. 그리고 짧은 지식들을 꺼내어 나름 어린이에게 자랑을 해보이고는 했다.

‘ 갈기게 난게 수사자고 아닌게 암사자야.’

‘ 쟤네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나봐.’

‘ 아닌데 저기 보이는데. 숨어있잖아. 얼굴만 보여.’

‘ 어 그러게. 보이네. 신기하다.’

그간 삶에 치여 보지 못했던 것들을 기가 막히게 어린이들은 찾아내 어른들에게 보여주는 듯 했다.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어린이들은 금세 찾아내 당당하게 자랑하고는 했다. 그들은 순수와 청량을 담은 눈빛으로 세상의 사소한 것들을 훑었고 이를 마치 전부인 것 마냥 보고 좋아했다. 혼자만 좋아하기는 아쉬웠는지 같이 손을 잡은 친구들과 부모님들께 나누기까지 하며.



당장 해야할 일들을 미루고선 어렵게 발걸음을 떼서 간 동물원은 정말인지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주말을 맞아 향했던 그 곳은 인파로 북적거리며 시끄러웠다. 집에서 고민만 하느라 허탕한 시간을 허비했던 나는 점점 그 세계로 빠져들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어린이들과 손을 맞잡고 동물원에 왔을 어른들, 사랑의 힘에 이끌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연인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 친구들과 히히덕 거리며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어린이들, 잠 자느라 바빠 구경꾼에는 안중에도 없는 동물들, 어디에 숨어있는지 콧털하나 보이지 않고 제 영역을 지켜내는 동물들. 바쁘다는 핑계로 여유를 찾지 못했지만 그 곳에서만큼은 한량한 모습으로 서성이었던 미지의 어른.


미지의 어른은 처음 와본 그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 길을 잃고는 했다. 여기 아까 왔던 곳이잖아. 다시 돌아가야지 뭐. 길 잘 못 든 것 같은데 저쪽 길로 한 번 가보자. 지도 하나 없이 처음 와본 그 세계에서 이리 저리 헤메이며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서두르지도 않고 정해진 기한이 없으니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동물원의 동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고 오라는 압박을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압박을 주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동물들은 구경꾼을 농락하듯 잘 숨어버리고는 했으니 말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지의 세계에서 시간의 중력을 느껴보고는 했다. 길을 잘 못 들어도 다시 되돌아가며 시간을 허비했고 애써 찾지 못하는 동물들을 찾는데 힘을 낭비했다.


그 세계에서는 마땅한 이유나 변명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새로운 구경거리가 등장했고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그 시공간들 속에 나는 젖어들어 동물원 밖의 세계를 잊어버리고는 했다. 누구도 길을 정해주지 않았고 관람 방식을 일러주지도 않았다. 코끼리를 먼저봐도, 사자를 먼저봐도 아무 탈이 없었다. 누군가 내가 보이지 않는 표범을 찾았다고 해도 어떻게 찾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웠다.


잊고 있었던 동심이 차오르며 동물원 밖을 나설 때는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 고민을 하고는 했다. 무엇을 먹지, 이따 집에가면 무엇을 해야하지, 집에는 지하철을 타고 갈까 버스를 타고갈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추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잠시 묵혀두었던 자잘한 고민들에 휩싸였다. 어린이가 된 것 같아 잠시 느껴졌던 해방감을 뒤로 하고 온 갖 사사로운 생각들에 멈춰섰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어른이구나. 철두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선택지를 고르는 어른의 세계에 살고 있구나. 어른이 되는 것이 쉬운 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은 버겁다.


결정한 것들에 따른 책임의 무게가 무서워 쉽게 선택하지 못하며 고민을 거듭하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감에 계속해서 현재의 선택지를 뒤엎는 나는 아직 어린이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미지의 세계에 빠져들었어도 이내 다시 현실의 무게를 마주하는 나는 아직 어리숙하다. 미지의 세계에서 찾지 못한 영역에 대한 아쉬움을 곱씹어보는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나는 참으로 순수하다.

어른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린 자신을 마주하는 과정이다. 아직은 어른이 되기에는 멀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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