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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Mar 23. 2021

태양이 인사하고 바다가 노래를 부르는 곳

여행 21일차: 자다르, 일몰이 환상적인 3000년 역사의 항구 도시

2019.10.12 여행 21일차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자다르

자그레브 맥도날드에서 먹은 맥모닝 세트
한산한 토요일 오전의 자그레브 거리

아침 8시 30분에 일어나 빈둥대다가 브런치를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다른 때보다 거리가 한산했다. 멀리 가기 싫어서 근처 맥도날드에 들어가 베이컨 에그 맥머핀과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맥머핀은 다른 맥도날드 햄버거와 달리 불량식품 느낌이 나지 않아서 좋았다. 빵이 쫄깃하고 계란이 부드러워서 하나 더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자그레브 시내를 지나는 파란색 트램
자그레브 시내를 지나는 파란색 트램

숙소로 돌아가 체크아웃을 한 뒤 파란색 트램을 타고 자그레브 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도심을 오고가며 멋을 더해준 파란색 트램 덕분에 자그레브는 '블루 시티'로 기억될 것 같았다. 터미널 2층에서 탑승장을 확인하고 자다르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정오에 출발한 버스는 휴게소에 한 번 들렀다가 3시 30분에 자다르 버스 터미널에 이르렀다. 


버스 터미널 앞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사님들이 다가와 "싼 값으로 시내까지 데려다줄게요"라고 했지만, 부다페스트에서 택시 요금을 바가지 쓴 적이 있어서 우버를 불렀다. 우버는 목적지를 설정하면 거리에 따른 예상 요금이 나와서 믿을 만했다. 생애 첫 우버 이용이었는데 기사님이 친절하고 요금도 비교적 저렴해서 만족스러웠다. 

자다르 숙소 섬머타임 아파트먼트

아드리아해 북부에 위치한 자다르는 무려 3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 고대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리 하나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연결되는데, 내가 예약한 숙소는 구시가지로 넘어가는 다리가 지척에 있는 섬머타임 아파트먼트였다. 우버에서 내려 숙소 앞을 서성이자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은 한 할머니가 "섬머타임 아파트 찾아왔어요?"라고 물었다. 내가 "네, 맞아요"라고 답하자 할머니는 대뜸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이내 "저를 따라오세요"라고 말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숙소 호스트는 카리스마 넘치는 첫인상과 다르게 따뜻하고 친절했다. 방 안까지 들어와서 열쇠로 문 잠그는 법, 세탁기 사용법, 자다르에서 가볼 만한 곳, 맛집 등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동양 여자애가 머나먼 나라에 혼자 온 게 걱정돼서 세심하게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든든한 호스트와 쾌적한 숙소를 만나 감사했다.  

자다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다리
자다르 구시가지 골목
자다르 구시가지 골목
자다르 맛집 Pet Bunara에서 먹은 소볼살과 단호박 퓨레
자다르 맛집 Pet Bunara에서 먹은 소볼살과 단호박 퓨레

짐을 정리하니 어느덧 5시였다. 속이 쓰릴 정도로 배가 고파서 사전에 알아본 맛집 Pet Bunara에 갔다. 분위기 좋은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단호박 퓨레가 곁들여 나오는 소볼살과 하우스 레드 와인을 주문했다. 음식은 비주얼과 맛 모두 훌륭했다. 소볼살은 갈비찜에 들어간 고기처럼 부드러웠고, 단호박 퓨레는 피로가 풀릴 만큼 달달했다. 항구 도시에 왔으니 해산물을 먹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고기를 먹은 게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다섯 개의 우물
육지의 문
육지의 문 근처 풍경

식당에서 직진하자 광장 한복판에 우물 다섯 개가 일렬로 늘어선 광경이 눈에 띄었다. 다섯 개의 우물은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에 대비해 비상 식수원으로 만든 것으로 19세기까지 이용되었다고 한다. 우물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가니 오른편에 육지의 문이 있었다. 육지의 문은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1543년에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방어하고자 세운 성벽의 정문이다. 문 가운데에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자다르 구시가지 풍경
나로드니 광장
성 아나스타샤 대성당 종탑
성 도나트 성당
성 도나트 성당
성 도나트 성당
성 도나트 성당과 로만 포룸

저녁 6시가 다 돼서 구시가지 중심으로 이동했다. 메인 광장인 나로드니 광장을 거쳐 성 도나트 성당으로 향했다. 성 도나트 성당은 9세기에 성 삼위일체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15세기부터 자다르의 주교 도나트의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투박하게 회칠한 벽면과 둥근 형태의 건물이 돋보였다. 


성당 앞에는 고대 로마의 광장인 로만 포룸이 있었다. 로만 포룸은 기원전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조성한 시민 광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현재는 건축물들의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로마 시대 유적을 보니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플리마켓이 열려서 광장의 예술적인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자다르 일몰
자다르 일몰
자다르 일몰
자다르 일몰
자다르 일몰
자다르 일몰

바닷가는 일몰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미 저물기 시작한 해는 점점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크고 동그랗게 변했다. 산 너머로 사라지기 전까지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노을은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할리우드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 왜 자다르의 석양을 극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와서 일몰을 감상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태양의 인사
태양의 인사
태양의 인사
태양의 인사
태양의 인사
태양의 인사
태양의 인사

해가 바다 밑으로 숨어버리자 다들 약속이나 한 듯 태양의 인사를 찾았다. 태양의 인사는 지름 22m의 유리 전도 원판에 전지판 300개가 내장된 설치물로, 낮에 태양열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해가 지면 형형색색의 빛을 발한다. 불빛이 켜지기 전에는 '이게 왜 자다르 대표 명소지?'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몇 분 뒤 태양의 인사가 여러가지 색깔로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어둠이 짙게 깔릴수록 불빛이 현란하게 빛나서 레이저 쇼를 관람하는 것 같았다. 

바다 오르간
바다 오르간
자다르 일몰
자다르 일몰
자다르 일몰

태양의 인사 옆 돌계단 또한 엄청난 인파로 북적였다. 계단에 작은 구멍이 송송 뚫린 것을 보고 바다 오르간임을 눈치챘다. 바다 오르간은 구멍을 통해 파도가 드나들면 계단 아래 내장된 35개의 파이프가 소리를 내는 '자연의 오케스트라'다. 계단에 앉아 귀를 기울이니 '뿌'하는 소리가 났다. 몇 초 후에는 아까와 다른 음의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도가 연주하는 선율을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니 신비롭고 낭만적이었다. 

해안가 산책로
해안가 산책로
해안가 산책로
성 도나트 성당
성 도나트 성당
자다르 구시가지 풍경
자다르 구시가지 풍경
자다르 구시가지 풍경

관광객들이 하나둘 떠나 고요해진 바다를 즐기다가 해안가를 산책했다. 주황빛 가로등과 잎이 무성한 나무가 쭉 뻗어 있어서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예스러운 골목은 은은한 불빛으로 물들어 감성을 자극했다. 성 도나트 성당은 유독 환한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예쁜 풍경이 펼쳐져서 구석구석을 누볐다. 

아이스크림 가게 Donat
아이스크림 가게 Donat

기념품점에서 마그넷과 엽서를 구매한 후 숙소 호스트가 가보라고 했던 아이스크림 가게 Donat에 방문했다. 스무 가지가 넘는 맛 중 딸기와 바나나를 선택했는데, 진한 딸기의 맛을 바나나가 부드럽게 잡아줘서 맛있게 먹었다. 올드타운 관광을 마치고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왔다.  

자다르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넘어가는 다리
자다르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넘어가는 다리
자다르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넘어가는 다리
자다르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넘어가는 다리
자다르 풍경

자다르는 '그다지 볼 게 없다'는 후기를 많이 봐서 기대감이 높지 않았던 곳이다. 하지만 자다르를 구경하는 동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연거푸 했다. 고대 로마에 온 듯한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바닷가에 위치한 현대적인 조형물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다리 하나만 지나면 수천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바다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현지인들이 부러웠다. 다음 날 자다르와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부터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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