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2일차: 로마 황제의 휴양지에서 최고의 숙소를 만나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머리를 말리던 중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었더니 숙소 호스트였다. 그녀는 "제가 지금 성당에 가서 늦게 올 수도 있어요. 체크아웃 할 때 제가 없으면 숙소 건물 옆 카페에 열쇠를 놓고 가세요"라고 알렸다. 내가 "네, 덕분에 잘 지내다 갑니다. 세탁기가 있어서 밀린 빨래도 했어요"라고 말하자 호스트는 "제가 얘기했죠? 세탁기가 최신식이라 엄청 편해요"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회사 그만둔 거 너무 걱정 말아요. 더 좋은 일자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저 하루하루 매 순간을 즐기며 사세요"라고 말했다. 전날 내가 퇴사여행을 왔다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진심 어린 충고와 격려를 해줘서 감사했다. 그녀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떨쳐 버리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호스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빵집 Mlinar에 갔다. 맛있어 보이는 빵 두 개를 고른 뒤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다리 위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먹었다. 자다르의 고즈넉한 풍경이 자꾸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스플리트에서 1박을 줄이고 자다르에서 하루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이미 숙소와 버스 예약을 마쳐서 급하게 일정을 변경할 수 없었다.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에 또 여행을 올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서 짐을 챙기고 나와 카페에 열쇠를 반납했다. 버스 터미널로 가는 우버를 호출하고 기다리는데 성당에 다녀온 숙소 호스트와 마주쳤다. 호스트는 "가기 전에 바다 배경으로 사진 하나 찍어 줄게요"라며 나에게 포즈를 요구했다. 비록 사진 구도는 엉망이었지만, 끝까지 챙겨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당신을 손님으로 맞이해서 기뻤어요. 잘 가요"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번 여행 중에 또 다른 좋은 인연을 만나 감사함을 느꼈다.
우버를 타고 자다르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플릭스 버스에 탑승했다. 오전 11시 30분에 출발한 버스는 2시가 넘어 스플리트 버스 터미널에 도달했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에서 수도 자그레브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 도시다. 터미널 주변은 사람도 많고 상점도 많아서 대도시 느낌이 났다. 하지만 야자수가 늘어선 바다 산책로 쪽으로 걸어가니 이국적인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잠시 여유를 누리다가 에어비앤비 숙소를 가기 위해 구시가지 골목으로 이동했다. 비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니 숙소 건물이 보였다.
3시부터 숙소 체크인이 가능한데 아직 2시 20분이라서 근처 식당 Konoba Korta에 들렀다. 런치 스페셜 메뉴인 그린 파스타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는데 파스타가 최고의 맛을 자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넓적한 파스타면에 연어와 새우가 듬뿍 들어 있어서 식감이 예술이었다.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양이 꽤 많았으나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숙소 건물 4층으로 올라가서 호스트를 만났다. 내가 지낼 방은 건물 꼭대기인 5층이었다. 호스트가 옥상 문을 열자 스플리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가 나왔다. 올드타운의 주황색 지붕과 우뚝 솟은 종탑, 바다를 항해하는 크루즈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호스트는 지도를 꺼내 스플리트에서 가볼 만한 곳을 안내한 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라며 웃었다. 기가 막힌 전망에 친절한 호스트까지 더할 나위가 없었다. 통유리 방에서 탁 트인 뷰를 즐기니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두꺼운 패딩 대신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찾았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은퇴 후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295년부터 305년까지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약 17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궁전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대리석 기둥으로 둘러싸인 열주 광장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로마 병사의 복장을 한 사람들은 광장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돋웠다.
광장 구경을 마치고 성 돔니우스 대성당 입구로 들어갔다. 성 돔니우스 대성당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성 돔니우스를 위해 만들어졌다.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영묘가 있던 자리인데 7세기에 대성당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경건한 자세로 성당을 둘러보고 황제의 알현실로 향했다. 황제의 알현실은 신하 혹은 귀족들이 황제의 거처에 드나들기 전 대기했던 장소다. 천장이 뚫린 돔 형태로 구조가 독특했는데 새파란 하늘이 동그랗게 잘린 상태로 보여서 예뻤다.
황제의 알현실에서 열주 광장으로 돌아와 지하궁전 홀로 내려갔다. 가지각색의 기념품들을 눈으로 훑으며 쭉 직진하니 리바 거리가 나왔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데도 거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길을 따라 줄지어 선 야자수와 노천 카페, 레스토랑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바다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해변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성한 야자수 옆으로 파도가 넘실거리는 풍광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왜 로마 황제가 스플리트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아드리아해를 품은 낭만적인 거리를 거닐며 잠시나마 로마 황제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까지 산책을 한 뒤 신시가지 구경에 나섰다. 쇼핑 거리인 마르몬토바 거리에 들어서니 자라, 판도라, 타미힐피거 등 여러 매장이 보였다. 자라 맞은 편에는 건물 벽면 위에 위치한 손가락 모양 조각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피르야 분수가 있었다. 물줄기가 반원을 그리며 정확하게 찻잔 조형물 안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Bili San에서 과일맛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다시 리바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오후 6시가 넘어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벤치에 앉은 연인들은 머리를 맞댄 채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나도 비어 있는 벤치를 찾아 우두커니 일몰을 지켜봤다. 어둠이 내린 바닷가와 거리에 켜진 은은한 조명이 조화를 이뤄 장관을 연출했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끽한 후 카페 겸 바인 Dujam에 갔다.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잔잔한 밤바다를 감상하니 마음이 평온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지?'라는 질문이 지금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호화 크루즈의 화려한 불빛은 바다를 밝히며 고요한 바다에 역동성을 더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높게 뻗은 야자수 위로 별빛이 쏟아지는 광경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열주 광장은 희미한 조명 아래 버스킹 공연을 기다리는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뒤 기타 연주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몇몇 사람들은 광장 중앙으로 뛰쳐나와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1700년의 역사를 지닌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다 함께 음악을 즐기고 있으니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된 느낌이었다.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노래를 몇 곡 더 듣다가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