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15.

시드 필드의 패러다임 이론

by 이기원

이제 당신은 영웅서사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 당신이 만드는 모든 스토리를 영웅서사에 입각해서 생각해보고,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더 많은 서사 구조를 공부하면 좋을 것이다.


영웅서사 다음으로 익히면 좋은 구조가 바로 시드 필드가 3막 구조를 발전시킨 패러다임 이론이다.


시드 필드의 패러다임은 외견상으로 볼 때는 매우 간단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구조에 플롯 포인트 1과 2, 중간점을 넣고, 밀착점(핀치) 두 개를 넣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조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몇 분의 일 지점에서 어떤 것들이 나와야 한다는, 다소 도식적인 차원에서 스토리를 보고 있다.


영웅서사는 스토리가 가진 의미에는 매우 충실하지만, 각 단계가 스토리 상에서 산술적으로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리듬감을 잃기가 쉽다. 하지만 스토리를 구조적 차원에서 보는 패러다임 이론이 가미되면 의미가 있으면서도 리듬적 측면에서도 훌륭한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영웅서사구조와 시드 필드의 패러다임은 스토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이다.


영웅서사는 '주인공이 어떤 여정을 거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현재 무엇을 하고 있고, 꿈은 무엇이야. 그런 그가 어떤 일을 계기로 모험에 뛰어들게 되는데... 친구와 적을 알게 되고...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식이다. 즉, 캐릭터에서 시작해서 여정을 추적하며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다.


반면, 시드 필드의 패러다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라는 화두로 시작을 한다. 주제부터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서사 구조를 활용하면, 스토리를 좀더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시드 필드의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스토리를 만들고자 한다면, 당신은 필수적으로 '어떤 얘기를 해볼까'하는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말이야 바른 말로, 어떤 얘기를 해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없는 작가도 있을까? 다들 어떤 얘기를 해보려고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오래 전 문우들과 스터디를 하던 망생이 시절 이야기.


"얘들아, 얘들아, 내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헤드헌터와 초등학교 여선생님이 펼치는 로맨틱 코미디야.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우와, 재밌을 것 같아요. 다음 주에는 시놉시스를 보여주세요!"


내가 이렇게 맞장구를 쳐준 이유는, 그녀가 우리 스터디에서 최연장자라는 사실 이유 외엔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다음 주에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이런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특공대 출신의 남자와 여의사의 멜로인데... 정말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아이디어 죽이지?"


그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그런 식이었다. 마트의 캐셔가 타임슬립하는 얘기야, 원수지간인 남녀가 하는 계약결혼 얘기야 등등. 그녀는 매주 새로운 얘기들을 들고와서는 어떨 것 같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어떤 얘기를 해볼까'에만 특화된 스터디 멤버였던 것이었다.


그렇게 본인 생각에만, 끝내주면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를 우리는 반 년 이상 들어야 했고, 도저히 참지 못한 우리(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스터디에 나오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녀는 다음 주에는 꼭 써올 거라며 자신만만해 하며 돌아갔다.


다음 주.


"얘들아, 끝내주는 아이디어가 생각났어. 게다가 이번에는 신선하기까지 해."


이번에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화를 냈다. 그 놈의 새롭지도 않은 아이디어를 매주 듣는 거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백했다. 스토리를 못 만들겠다고. 그 다음 주부터 그녀는 스터디에 나오지 않았다(훗날 그녀는 나의 말빨이면 다단계 판매왕이 될 수 있다며, 스카웃을 하러 찾아왔었다).


이 얘기를 읽으면서 찔리는 사람이 꽤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게 바로 당신일 수도 있다.


많은 비기너들이 좋은 스토리를 만들 요량으로 스토리텔러계의 문을 두드리지만, 아이디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한다. 어떤 얘기를 해볼까만 있고, 그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시덥지 않은 아이디어만 남발하며 허송세월을 하는 것이다.


그런 비기너들에게 시드 필드의 방법론에 나의 방법론을 추가해서 설명해 보겠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시드 필드는 당신이 쓰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아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의 생각하는 스토리의 주제를 찾아내라는 뜻이다.


가령, '계약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치자.


계약 결혼 스토리는 여성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단골 소재이다. 로맨스도 로맨스지만, 거기에는 결혼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계약이라는 장치를 통해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불안을 제거하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또한 현시대 사람들에게 연애라는 지난하고 불확실한 과정을 생략하고, 본 게임에 들어가 결혼을 대리체험하며 즐기게 한다.


시드 필드는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들에 먼저 답하라고 한다. 즉, '계약 결혼'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질문들을 정리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해보라는 것이다.


남녀는 각각 왜 계약 결혼을 하는가, 사랑없이 시작한 관계는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진짜 결혼이 아니란 사실이 들통나면 어떻게 될까? 다른 이성을 만나게 되면 그건 불륜일까? 진짜 사랑을 하게 됐는데, 계약 기간이 끝나 헤어져야 한다면? 결혼 계약서에 어떤 내용들을 넣어야 할까? 계약 결혼 중이라 서로의 약점을 더 숨기게 되지 않을까? 계약 결혼이 진짜 결혼이 되는 순간은?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직 숙성이 덜 됐기 때문이다. 주제를 찾아내려면, 내가 할 이야기에 대해 좀더 많이 좀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주제'를 찾아내는 것은 내가 이 책 앞부분에서 '대문호의 외손녀'의 예를 들었듯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인 작가들은 대개 주제고 나발이고, 일단 재밌다고 생각하면 쓰기 시작하기 때문에 주제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기도 하다. 하지만 당신이 원 히트 원더가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주제에서 스토리를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제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르를 이해하고, 설정에 구체성을 더하라.


그 다음 순서는 내가 제안하는 방법인 리서치이다.


전에 내가 얘기했지만, 어떤 스토리에는 어떤 인물이 필요하고, 그 스토리에서 그 인물은 반드시 어떤 주제를 구현한다는 뜻으로, 스토리와 캐릭터와 주제는 같다고 말했다(스토리 = 캐릭터 = 주제).


계약 결혼에 관한 작품을 쓰기로 했다면, 계약 결혼을 소재한 작품들 중에서 히트작들을 여러 편 찾아보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분석을 해봐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생각으로.


개중에는 혹시라도 베끼게 될까봐 아무런 레퍼런스도 참고하지 않고, 온전한 자신만의 독창성을 승부하려는 비기너들이 있는데, 제발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로버트 맥키가 말했지 않는가. 창의성은 플롯에 있는 게 아니라, 플롯을 전개하는데서 나온다고. 나는 멜로디를 가져오라고 하는 게 아니다. 코드 진행을 가져오라는 것이다(캐논 변주곡의 코드 진행으로 만든 발라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


일단 당신은 계약 결혼 스토리들 중에 성공한 것들을 보면서, 공통 분모를 찾아내야 한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 남자 주인공들이 가지는 공통점, 그 스토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들, 즉 스토리, 캐릭터, 주제 등을 찾아내는 것이다.


계약 결혼 스토리들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위기를 맞고, 어떻게 해결이 되는지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파악되면, 내가 쓸 이야기의 캐릭터를 찾는 작업을 할 차례이다.


남녀 로맨스는 남자와 여자의 조합이 매우 중요하다. 즉, 여기서는 계약 결혼 당사자들의 조합을 챙겨야 하는 것이다. 스토리라는 것이 결국엔 누군가에 관한 것이니까.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당신에게 계약 결혼을 시켜야 하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의 조합이 먼저 생각났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조합이 최선의 조합인가 점검해 봐야 한다. 좀더 성공적인 결과를 위해서 남주 캐릭터를 바꿔보고, 여주 캐릭터를 바꿔보는 일을 해봐야 한다. 계약 결혼 스토리의 관전 포인트는 아무래도 남주와 여주의 케미니까 말이다.


여자 주인공은 시청자들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캐릭터여야 한다. 내가 여주인공 입장이 되어 어떤 남자와 계약결혼을 한다는 판타지 속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계약 결혼을 선택할만한 명확하고 절실한 경제적인 이유나 전 남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같은 동기가 있어야 하고, 남주와 대비되는 돌봄 능력과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남자 주인공은?


여주에게 감정이입한 시청자가 결혼하고픈 이상형이어야 한다. 일단 부유한 자산가나 전문직을 가진 남자여야 하고, 냉철한 현실주의자 또는 츤데레형 보호자여야 한다. 또한 여자가 치유해줄 수 있는, 상처 또는 트라우마를 가질 수도 있다.


여기서 남자는 탑배우라 설정하고, 여자는 동사무소 직원으로 설정(편의상 제목은 '탑배우와 동직원')했다고 치자.


남주에게 있어서 계약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번에 걸친 열애설과 스캔들로 인해 추락한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사무소 직원과의 결혼은 '한 편의 동화' 같은 반전서사를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주는 부모과 오래 살아온 집이 어떤 사정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어, 그 집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 계약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 정도 개요는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위에서 하려 했던 질문들을 던져 보는 것이다.


아, 잠깐, 한 가지 더 있다.


거의 모든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은 여자이다. 여성이 주인공에 감정이입하여 사랑의 모험을 떠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질문들은 여주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바뀌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왜 이 결혼을 선택하려는 걸까? 정말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내 삶의 어떤 빈자리를 계약이라는 말로 덮어버리고 싶은 걸까. 그 사람은 왜 나를 선택한 걸까. 사랑 없이 시작된 관계가 언젠가 사랑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우리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면 나는 무엇을 잃게 될까. 평판일까, 자존심일까. 그 비밀은 어떤 상황에서 드러나는 게 좋을까? 우리 사이에 각각의 이전 애인이 개입된다면, 그건 불륜일까? 만약 내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면, 계약이 끝나는 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결혼 계약서에는 어떤 항목들이 들어가 있어야, 우리를 가깝게도 멀게도 만들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그를 잃는 게 두려워진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이전보다 확실히 구체적이면서도 쓸만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만약 여기서도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다단계 판매원으로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대답들을 꼼꼼하게 들여다 보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제인 것이다.


주제로 에피소드들을 엮어라.


이 '탑배우와 동직원'의 주제를 앞서 배운 공식 'A가 B보다 낫다(A > B)'로 표현해 보자.


여기서 어쩌면 당신은 '옳다구나'하고는 '계약 결혼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하고 쾌재를 부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틀렸다. 계약 결혼은 설정이다. 설정이 설정 안 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주제는 없다. 말도 안 된다. 주제는 계약 결혼을 한 이들의 행보를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로맨스 드라마의 주제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회피하는 것보다 낫다'이다. 여기에 계약 결혼이라는 설정은 주제를 빠르고 강렬하게 전달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주제는 캐릭터이자 스토리라고 말했다. 그 이론을 접목시키면, '사랑을 선택하는것이 회피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주제를 살릴 수 있는 '어떤 이유로 사랑 또는 결혼을 거부하는 캐릭터가 나와야 하며, 그 캐릭터가 계약 결혼이라는 설정 안에 들어가 끝내는 사랑을 선택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초 공사를 한 뒤, 본질적 질문으로 얻은 대답들을 에피소드화해서 작가가 자기 입맛에 맞게 스토리를 발전시키고 베리에이션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자기 딴에는 기가 막힌 에피소드지만, 실제로는 불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당신이 비기너라면, 어떻게든 그 에피소드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가령, 남주와 여주가 나오지 않는 동사무소에서 체육대회 시퀀스 같은 게 있을 수 있다. 당신은 거기에 나오는 운동 에피소드와 장기 자랑에 꽂혀서 초고에도 넣고, 수정고에도 어떻게든 살려놓고, 주변에서 제발 빼라는 피드백에도 불구하고 재수정고에도 기어이 넣고, 여태까지 그 에피소드를 지킨 것이 아까워 최종고에까지 고집스럽게 넣었고, 끝내 그것이 촬영되기까지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에피소드는 편집할 때 잘려나갈 확률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그 에피소드는 주제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시퀀스는 시청률의 정체 또는 하락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에피소드를 선택해야 할까?


에피소드를 선택할 때 재미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주제를 살리는데 유리한가, 불리한가로 판단하는 것이다. 단일 에피소드로 볼 때는 재미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거대한 스토리 속에 들어갔을 때 오히려 스토리를 망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주제를 살리는데 유리한 에피소드이지만 재미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에피소드들이 스토리 속에 들어가 주제를 살리는데 기여한다면 충분히 재밌어진다.


결말을 먼저 정하고, 시작을 정해라.


시드 필드가 왜 '시작'대신 '결말'을 먼저 언급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당신은 아마 그냥 본능적인 감으로 스토리를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는 '결말'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을 몸에 장착하기 바란다.


추리 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는 항상 결말을 먼저 생각하고, 그 결말이 최고의 결말이 되려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본격 추리소설의 백미는 의외성이기 때문에 그 범인이 절대 범인일 리 없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스토리도 다르지 않다. 결말에서 최고의 감동을 위해서는, 그 감동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결말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가 만나 본 작가 지망생은 물론이고 프로 작가들 중에서도 결말을 생각하지 않고 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의 속내는 대략 이럴 것이다. 멋진 도입부가 만들어지면, 그에 걸맞는 멋진 결말이 만들어질 거야. 물론, 그런 기적적인 일이 일생에 한 번 정도는 운좋게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도입부만 수십번 씩 고쳐쓰는 신세가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론을 정해 놓았지만, 도입부를 계속 바꿔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자와 같이 뜬구름을 잡는 게 아니라, 결말에 맞는 최적의 도입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대개 도입부가 점점 좋아진다.


뻔하더라도, 결말은 정해져야 한다. 그래야 뻔하지 않게 결말에 이르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게 된다.


결말을 결혼 계약서를 찢고, 혼인 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는 것으로 정했다 치자. 몇 개의 시작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결혼 계약서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인생에 결혼이란 없을 거라 선언하는 여주의 스토리로 시작할 수 있으며, 남주가 얼마나 심각한 바람둥이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좋다. 앞뒤가 말이 되면,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어차피 쓰면서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일단 견고하게 이야기의 앞뒤를 설정해 놓으면, 그 다음에는 시작이라는 부품을 바꿔끼는 거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앞과 뒤가 결정되지 않으면, 도입부만 허벌나게 계속 쓰는 일이 반복될 수 있으니 주의하기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