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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ois enfants Jul 12. 2020

“괜찮은 엄마가 되고 싶은가요?”

양육자가 느끼는 실패와 두려움에 대하여

20대에 저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괜찮다'는 성품을 아우르는 뜻으로 이해력이 높고 타인에 대한 포용력이 높다고 여겼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방황하는 청춘의 실상을 드러낼 때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게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30대 중반이 되니 사회적으로 '골드미스'라는 단어가 유행했습니다. 30대의 '괜찮다'라는 스스로의 평가에는 물질적인 것도 포함됐습니다. 
 

괜찮은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10시간 진통 끝에 출산한 작은 생명체에게 “아가야, 내가 엄마야”하며 감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기를 품에 안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과 나누는 교감이 육아의 어려움을 넘어서게 했습니다. 이유식을 예민하게 거부하고 19개월에 독립보행을 하고 대소변을 늦게 가려 이불에 잦은 실수를 할 때도 잘 기다릴 줄 아는 괜찮은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다른 친구들보다 한두 템포 늦다고 여겨지니 아이에게 잔소리가 많아졌습니다. 아이의 성과가 아이의 가치를 대변하는 듯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7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아이가 2+3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열 번도 넘게 아니, 수십 번은 반복했을 간단한 더하기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머릿속의 회로가 뒤엉킨 것처럼 엉뚱한 소리만 하는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정말 모르냐'라고 소리 지르고 ‘장난하냐며'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아이가 정리정돈이 안되고 유치원생 같은 모습에 담임선생님의 상담 요청이 있었고 학습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히 갈려 엄마로서 애를 먹었습니다. 아이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는 불편함이 생겼습니다. 그 마음을 기저로 공부를 가르친다는 명목 아래 처음에 한 두대로 시작한 회초리는 손지검으로 변하는 처참한 일들이 몇 차례 더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제 자신이 두려웠습니다. 아이의 기질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저는 학습에 대해 당연히 성과를 보여야 하고 기본 이상은 해야 한다는 무의식을 뿌리 깊게 지닌 엄마인 것도 발견했습니다. 아이가 예술가처럼 자기 색깔이 확고하고 마음의 동기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강한 고집을 지니고 있어 결코 엄마 마음대로 할 수도, 될 수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데 말입니다.


아이는 코로나 시대, 중학교 1학년의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공부 습관이 잡혀 있지 않고 특히 수학은 안드로메다를 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코로나로 인해 가정에서 온라인 학습을 하니 학습과정에서 또다시 갈등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특히 수학에서 불협화음이 일어 손이 올라가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극복했노라 생각했지만 원점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며칠 뒤 아이가 온라인 학습 중 수학 과목에서 100점을 받았노라 환호성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삼일천하! 아이의 100점은 의도치 않았으나, 의도한 단체 커닝의 결과로 드러났습니다. 자기도 수학을 잘하고 싶다며 우는 아이에게 “너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배짱으로 좋은 점수를 받길 원하느냐? ”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100점으로 기뻐하는 것의 위험성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점수보다 정직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깊이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가 스스로의 다짐을 신뢰하며

아이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감정적인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나 양치기 엄마로 돌아선 것처럼 아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백점을 맞고 싶어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아이도 엄마도 깜깜하고 어두운 터널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어떤 아빠가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며 한 시간 내내 뒷바퀴를 잡아주며 균형을 잡으라고 소리 지르며 싸웠다고 합니다. 아빠가 도저히 못하겠다며 손을 떼고 신경질을 잔뜩 냈는데 얼마 후 아이들이 넘어지고를 반복하더니 스스로 자전거를 타더랍니다. 손을 떼야 아이가 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 하기 싫다며 끝내 ‘노력 요함’의 평가를 받았던 줄넘기를 최근 체육시간에 a+을 받았습니다. 손가락이 아프다며 쳐다보지도 않던 리코더를 올해 들어서는 내내 붙잡고 연습하더니 지금은 연주를 합니다. 아이에게는 자신의 속도가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불안한 엄마를 경험하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이때 아이의 어떠한 성과와 관계없이 생명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심연을 흔드는 어지러움이 있을지언정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게 서 있길 바랍니다. 어쭙잖이 자족하는 괜찮은 엄마가 아니라 바위 같이 든든한 엄마, 그루터기 같은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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