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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뚜두 Jun 04. 2020

차별의 특정 알고리즘이 있는 걸까?

조르조 바사니의 금테 안경 & 조지 플로이드 사건

작가는 전지적 관찰자 시점의 서술자인 ‘나’를 등장시켜 가상의 도시(북부 이태리 어디쯤) 페라라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찰의 주 대상은 페라라 시민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비인후과 의사 파디가티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그이지만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딱 한  가지

적잖이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 미혼이라는 점.  

1930년대 보수적 분위기로 팽배한 이태리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

낙인. 동성애자

그런 그를 지켜보는 유대인 서술자 ‘나’

누구나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파디가티를 의심하다 이제는 단정지어버리는 사람들. 나중에는 주민들이 파디가티를

'그거'라고,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며 정상 범주에서 그를 배제시켜 버린다.

‘그거’라는 표현만으로도 파디가티의 존재는 그들 세계에서 완전히 정리된 듯 하다.

2차 세계대전 전의 유럽 분위기를 감안할 때, 파시즘 시절의 이태리를 떠올린다면

유대인과 동성애자 둘 중 누가 더 안됐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유대인인 ‘나’는 파디가티에게서 묘한 동병상련을 느낀다.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되다 파디가티의 비극적 자살로(자살이라 단정 짓지는 않지만 그런 것처럼 묘사) 마무리 짓는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문학적 해석을 시도할 생각은 없다(능력도 없다)

다만 소설을 읽으며(경장편이라 읽기도 좋다), 또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통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노예무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통해 죽도록 차별과 멸시를 당한 흑인들이 Asian을 대할 때 보여주는 태도와 차별의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 땅에서 자행되는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해, 이성애자에 비해 소수인 동성애자들이 상대적 소수인 트렌스젠더에 보이는 어떤 터부시한 태도에 대해.   


물론 모든 흑인들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모든 동성애자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더불어 이런 논조를 들어 그렇기에 차별이란 행위가 인간 사회에서 당연하고도 만연해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와서 너무 열 낼 것 없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그저 특정 사건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차별이 우리들 내부에 뿌리 깊게 내재돼 있다는 것, 특정 인종, 계급, 집단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현실 정치 안에서는 당연히 그 차별의 형태와 규모 정치적 함의 등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작은 차별의 사례를 들어 큰 차별의(구조적 모순이 만들어내는 차별) 문제를 희석해 생각하려는 바도 결코 아니다. 윤리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니까.


다만 차별을 통해 발현되는 인간 이기주의는 모든 사회에, 모든 종교에, 모든 신념에, 모든 인종에, 인간 그 자체의 본성에 내재돼 있다는 나의 뇌피셜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글을 통해 정리해본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외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쁨에 들떠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 문장을 통해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의 현재 주장과 결이 많이 다르지만 그것의 속성에 있어서는 비슷한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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