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성(원작: 맥베스)이 먼저다. 동시에 아키라의 페르소나 미후네 도시로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서서히 내 상상의 공간을 집어 삼켜나가는 미후네의 얼굴.
그 얼굴에 빈틈이라고는 없다.
광대와 인중, 잔주름과 미간 하물며 귓불에 있어서도 증오 혹은 광기와 후회가 가득 차 있다.
피할 수 없는 죄책감, 이에 따르는 자기 불신, 스스로의 선택이면서도 이미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만 같은 부조리한 삶의 전개에 분노하는 한 인간의 얼굴.
온전히 그 인물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미후네.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원래의 그 인물에 의해 빙의된 건지 모르겠는 진지함.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면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삶에 있어 진짜와 가짜, 매트릭스와 매트릭스를 벗어난 삶의 차이가 있는 걸까? 하는 질문
매트릭스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든 매트릭스의 실체를 깨달았든 ‘삶’이라는 이름 안에는 피할 수 없는 갈등과 운명의 부조리가 있을 뿐.
알고 당하느냐 모르고 당하느냐의 차이 뿐인지 모르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거짓된 삶에서 깨어난 네오가 여전히 사랑과 운명 대의와 개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걸 보며 도대체 뭐가 달라졌다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기계들의 숙주로 존재하나 깨어난 인간으로 삶을 영위 하나 우리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를 바가 전혀 없는데...
감독이 미리 알려주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는 설이 있음
거미의 성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맥베스』를 원작으로 했기 때문일까?
유독 나는 운명인 듯 운명 아닌 운명 같은 삶의 장난 속에 지쳐버린 미후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걸 좋아한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배경에 온전히 젖어든 인간의 얼굴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개인의 얼굴.
정해진 운명이든 자신의 선택이든 삶의 형태는 상관이 없다는 듯 거기엔 그저 고민하는 페르소나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구로자와 그리고 미후네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미장센, 화면을 뚫고서 보는 이의 삶 속으로 쏟아져 나오는 그 거대한 질문을 던져대는 그들이 좋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런 그들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어째 설까?
어쩌다보니 그들의 함께 작업한 열여섯 편의 작품을 거의 다 보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유투브에 올라온 토막토막의 장면을 볼 때가 있다. 특이한 건 어느 장면을 보던지 쉽게 빠져든다는 점이다. 정서의 흠뻑 젖음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회전이 필요한데 두 콤비의 영화를 볼 때면 그런 사전 작업 없이도 단숨에 빠져버린다는 게 신기하다. 이와 비슷한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있다.
이들 작품 속에서 나는 순식간에 압도당하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만다. 현실에서 꿈을 꾼다고 표현해야 할까, 과장을 조금 보탠 다면 물아일체를 경험한다고 할까?
생각해 보면 삶을 대하는 작품 속 인물들의 자세 때문 아닌가 싶다.
그 진지한 눈빛,
너무 힘주고 살지 말자고 다짐하는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허투루 살려는 건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작품 속 미후네가 보여주는 그 진지한 표정과 태도를 사랑한다.
1957년 작이지만 분장 또한 훌륭
태도는 신념의 반영이고 신념은 곧 삶의 결말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이다.
운명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우리의 행로를 이미 정해놨다면 신념은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운명론자도 그렇다고 완전한 확률론자도 아니지만 인생은 그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 아닌가 싶다.
그 두 가지 요소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우리들의 인생 항로, 그 항로 속에서 짓게 되는 인간의 얼굴. 도저히 행과 불행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후네의 그 표정.
나는 구로자와가 펼쳐내는 서사 속에서 운명의 부조리를 온 몸으로 표현해 내는 미후네 도시로가 좋다.
마이 favorite, myself
나의 기호가 나 자신을 반영한다면,
나는 구로자와 그리고 미후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미장센을 사랑하는 남자다.
영화 거미의 성을 궁금해 할 누군가를 위해 몇 가지 정보를 남긴다.
: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를 일본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옮겨 각색한 1957년 영화. 주연은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 1920-1997)이며 영어 제목은 Throne Of Blood, The Castle Of The Spider's Web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일본 센고쿠 시대의 배경으로 각색한 영화로써, 일본식 사극 연기인 노(能)를 차용한 것이 특징이다. 노는 가면극과 음악이 더해진 종합예술이라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맥베스》를 따라가지만 맥베스에 해당되는 인물(미후네 도시로)의 극중 최후가 원작과는 다르게 각색 됐다. 원작에 나오는 대사를 단 한 마디도 차용하지 않았고 희곡의 특징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해 대사나 설정을 단순화시킨 것또한 특징이다.
영화 줄거리
중세 센고쿠 시대, 지방 반란군을 진압하고 귀환하던 와시쯔(미후네 도시로)와 미키 두 장군이 일행과 떨어져 거미의 숲을 지나다 우연히 마녀(원령)와 마주치며 영화는 시작된다. 마녀는 와시쯔가 영주가 될 것이며 그런 다음 미키의 아들이 와시쯔를 이어 영주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예언은 하나둘 맞아 들어가기 시작하고 와시쯔와 그의 아내 아사지(야마다 이스쯔)는 점점 예언에 집착한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와시쯔는 권력을 탐하는 아사지의 부추김에 넘어가 영주를 살해한 뒤 결국 거미의 성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고는 미키마저 살해. 이후 죄의식에 사로잡힌 와시쯔는 죽은 미키의 환영에 시달리게 되며 점차 성의 주민들로부터도 인심을 잃어간다.
한편, 살아남은 미키의 아들은 세력을 규합해 와시쯔에게 대항한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와시쯔가 마녀를 찾아가 다시 한 번 예언을 구하자 마녀는 "거미의 숲이 성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결코 패하지 않을 것"라는 신탁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