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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뚜두 Jun 25. 2020

지하철에서 얼마나 빨리 걸으세요?

무시무시한 '붉은 여왕 효과'

지나갈게요.

잠시만요~

씁!

평소 성격이 급한 편이 아니지만 지하철에서는 빨리 걷는 편이다. 특히 탈 때, 내릴 때, 긴 환승 통로를 걸어야 할 때, 비워둔 에스컬레이터 한쪽 길에서 종종 걸음을 칠 때. 그럴 땐 간혹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앞사람의 뒤꿈치를 건드릴 때도 있다. 아주 가끔은...  

공항철도와 9호선 급행을 자주 이용하면서 성향이 바뀐 걸까? 환승 시간이 간당간당할 때는 특히 더 그런데, 그렇다고 나만 빨리 걷는 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뒤에 위치할 때가 많으니까.  


그래서 내 바로 앞에서 걷는 사람의 속도가 중요한데 그러다 보니 느린 사람 뒤에 위치할 땐 속이 터질 때가 있다. 연세 지긋한 분이 그러면 이해라도 되지만 애매한 나이대의 분들이나 혹은 젊은 사람이 매가리 없이 느릿느릿 걸을 때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집에 빨리 가 싫으세요?'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레이저를 쏜다.

하지만 느릿느릿, 성격이 무던한 사람들은 자신이 레이저를 맞았는지도 모른다는 게 함정.   

이래 저래 추월을 시도해 봐도 안 될 때면 나는 앞을 막아선 거북이들을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하기 시작 한다.

마치 선량한 내게 피해를 주었다는 듯.  

그러다가 깜짝 놀라 자문한다.

느리게 걷는 다는 게 욕먹을 일인가?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를, 시간계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한데...  

앰뷸런스 비켜주지 않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들을 당연한 듯 비난했던 걸까?

부끄럽지만 종종 그랬었노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 경보하듯 성큼성큼 걷는 걸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까? 처음엔 나 역시 사람들 흐름에 떠밀려 길들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 때는 그런 속도에 불편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왜 빨라져만 가는 사회의 속도를 ‘기본 값’으로 인정하게 된 걸까. 그리고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맞추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한 존재로 치부하고 있까?


화요일에도 그랬다. 한 번 앉지 못하면 한참동안 서서 가야 하는 9호선 급행 지옥철 문이 열리기 직전, 네 줄에 맞춰 선 우리들은 숨을 고르며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특히 왼쪽에서 두 번째 열 사람들의 눈빛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여차하면 옆 사람을 밀칠 준비를 하는 듯 팔꿈치를 벌리기 시작하는 50대 중반의 아저씨, 그와 겨우 2센티 정도의 틈만 남겨놓고 바짝 붙어선 30대 초반의 키 큰 여성 그리고 이미 영혼은 한자리를 맡아 놓은 것 같은 눈빛의 할아버지. 그에 반해 우리 줄 맨 앞에 선 아주머니는 느긋하다.

이 분, 왜 이러지?

왜 자세를 갖추지 않는 거야. 전철이 들어오고 있는데, 곧 지옥문이 열릴 텐데……. 한 시간을 서서 가느냐 느긋하게 유툽을 보면서 가느냐는 한 끗 차인데..

'아주머니, 자기는 앞자리라고 여유부리면 뒤에 선 저는 X되는 겁니다. 그러지 마세요.'

맘 같아선 그녀를 밀치고 뛰어 들고 싶었지만 현실은...

핸드폰 보랴 마스크 고쳐 쓰랴 밍기적댄 아주머니로 인해 나는 결국 자리를 놓치고 말았다.

다른 줄은 3번 째 열 사람까지도 자리에 앉았는데 나는 앉지 못했다. 분했다. 더욱 분한 건 그 아주머니는  자리에 앉았다는 것. 배신감이 밀려왔그 순간 나는 그녀를 기본 값을 지키지 않은 한심한 사람 그래서 내게 피해를 준 사람으로 매도했다.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로 걷을 자격이 있는데...

왜 종종 그걸 잊는 걸까?

『거울 나라의 앨리스』속 붉은 여왕이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스스로가 만들어 낸 속도의 저주에 갇히게 된 걸까?

"계속 뛰는데, 왜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이렇게 달리면 벌써 멀리 갔을 텐데..."

붉은 여왕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는 두 배 더 빨리 달려야해."

붉은 여왕이 있는 거울나라는 한 사물이 움직이면 다른 사물도 그만큼의 속도로 움직이는

특이한 나라였기에...


붉은 여왕 효과'는 어떤 대상이 변화하더라도 주변 환경이나 경쟁 대상도 마찬가지로 변화하기에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제자리에 머물고 마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주인공인 앨리스에게 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자신이 움직일 때 주변 세계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달려야 겨우 앞지를 수 있다는 말. 이 에피소드를 이용해 시카고대 진화학자 리 반 베일른(Leigh Van Valen, 1935~2010)이 생태계 편형 관계를 묘사하는 차원에서 붉은 여왕 효과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오늘 날에는 비즈니스 업계의 적자생존 룰을 설명할 때 종종 사용되곤 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여기서 말하는 배경이라 함은 우주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결국 나와 같은 다른 누군가의 속도가 중요한 것이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우리가 조금씩 여유를 갖는다면, 느리게 걷기를 실천한다면 어떻게 될까.

끝내는 세상이 망하게 될까?

급한 사람들 빠르게 걷고 그 외조금 천천히 걷는 게 기본 값이 된다면... 어떨까.

나부터 실천하라면 할 수 있을까? 글쎄...

약속 시간에 늦을 게 뻔 한 상황에서도 실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만큼은 다짐해 보려 한다. 내 앞에서 느릿느릿 걷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로...    

진짜 속편하고 여유 만땅인 영혼을 만난다면

‘남쪽으로 튀어!’의 지로 아빠와 같은 사람을 만났구나 하고 생각하기로!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중 하나일 니까...

나는 나의 속도로, 당신은 당신의 속도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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