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부재의 시대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제작한 수어영상소설 'Black Painted World'의 바탕이 되는 스마트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코로나19기록’ 프로젝트의 기본 취지에 맞춰 코로나로 인해 가장 소외되고 고통 받는 커뮤니티 중 하나인 ‘한국농인'들이 처한 현실을 청인(일반인)들에게 드러내고자 시도했다. 더불어 수어 체계를 바탕으로 문장(농인들의 문장 해석체계는 청인들과 다름)을 해석하는 농인의 입장에서 문학을 향유할 수 있도록 창작 소설을 ’수어 영상 소설‘로 전환, 이를 바탕으로 수어에 대한 청인들의 인식이 개선되고 다른 문학 작품들 또한 수어 작품으로 번역되기를 소망한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세상은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청인들은 마스크를 쓴 채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아니 그들은 얘기를 잘만 나눴다. 청인들의 입을 감싸고 있는 하얀 혹은 검은 마스크가 쉴 새 없이 씰룩거렸다. 알아듣는 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면 상대는 그에 맞춰 눈웃음을 지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입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나눴다. 입술 위에 희미하게 그어진 잔주름, 양쪽 입가의 비뚤어진 생김새, 살짝 드러나는 잇몸과 웃을 때 살포시 들어가는 보조개를 읽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 게 가능해 보였다. 그런 것 없이 읽는 감정은, 마음은, 소음일지도 몰라. 생각했다.
한 순간 세상은 바뀌어져 있었다. 아침에 길을 나섰을 때 처음 마주했던 그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흐린 날의 아침 7시 풍경. 출근길을 나선 사람들, 가방을 둘러멘 학생, 가게를 정리하고 있는 주인들. 모두들 잔뜩 긴장한 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 역시 마스크를 쓴 채였다. 그때, 킥보드를 탄 남자애가 쌩하니 옆으로 달려갔고 벤치 아래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 그 틈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안개처럼 낮게 깔린 구름이 햇살을 감추고 있었다. 쳐든 고개를 살짝 돌려 길가에 세워져 있던 볼록 거울을 바라보았다. 볼록하게 일그러진 세상, 나는 그 볼록거울을 바라보며 마스크 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입 모양에 맞춰 투명하게 처리한 비닐 부위에 어느새 습기가 찬 듯 보였다. 습기 사이로는 바른 듯 만 듯 베이비핑크 립스틱의 입술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입을 벌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한 번 부딪히고 다시금 걸음을 걸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볼록거울 속에서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버린 듯했다.
주문도 하지 않고 멍만 때리고 있을 순 없어 사이렌 어플을 켰다. 내 선택은 언제나 따뜻한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우산을 펼치는 이들과 종종 걸음을 치는 사람들. 아침 예보에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우산을 살까? 이왕 사야 한다면 보라색으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음료가 준비 됐다는 알람을 놓친 나는 서둘러 픽업대로 갔다. 픽업대는 분주했다. 나 말고도 앞에 세 사람이 더 있었고 그들 뒤로 보이는 점원은 큰소리를 지르듯 홀을 향해 목을 길게 빼며 상체를 기울였다. 복잡한 걸 딱 싫어하는 나는 눈으로 픽업대 위에 있는 음료 잔을 확인했다. 라떼 두 잔, 프라푸치노로 보이는 음료 3잔과 샌드위치 그리고 아메리카노 한 잔. 점원이 일일이 확인해 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대충 알아서 자신의 메뉴를 들고 사라졌다. 내 차례가 되었고 점원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나는 내 것이라고 확신하는 아메리카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언제 왔는지 스카프를 두른 여자가 나보다 먼저 손을 뻗어 내가 집으려던 아메리카노를 잡았다. 내가 당황하며 손을 빼자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당황한 내 표정을 읽은 여자는 점원에게 뭐라 말했고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하얀 마스크가 움직였다. 뭘 확인하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연거푸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걸었다. 당황한 내가 대꾸도 하지 못하자, 점원은 날 더 똑바로 바라보며 종용하듯 말을 이었다. 점원의 하얀 마스크는 화가 난 듯 더욱 크게 씰룩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잠깐이라도 마스크를 내리고 대략으로라도 표현해야 할지 수어를 해야 할지……. 점원의 미간은 찌푸려졌고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났다. 내 아메리카노를 집어든 여자가 다시금 점원에게 뭔가를 물었고 점원이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 얘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입술을 결코 읽을 수 없었다. 내가 더욱 당황한 표정을 짓자, 점원은 그제야 테이블 가장자리에 있던 잔에 손을 뻗어 내 앞에 내놓았다.
‘이건 뭐지?’
스카프를 두른 여자는 몸을 휙 돌려 테이블로 돌아갔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와 내 앞에 놓인 잔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녀가 시킨 것 역시 따뜻한 아메리카노, 숏 사이즈였다. 늦게 찾으러 간 탓에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는 구석으로 밀려있었던 듯했다. 어느새 내 뒤로 많은 손님이 줄을 지어 있었다. 민망한 마음에 서둘러 톨 사이즈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잠시 멍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봤다.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기도 떠들기도 하고 노트북으로는 업무를 봤다. 조금 전 나와 옥신 간식하던 여자는 바깥 날씨가 궁금했는지 창가 자리에 앉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훑고는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색한 기분에 마스크를 내리고 잔을 갖다 댔지만 마실 수 없었다. 어쩐지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마시지 않은 커피를 반납대에 놓고 밖을 나섰다. 거리는 어두웠고, 사람들은 바삐 걸었다.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고 굵어진 빗방울이 정수리와 어깨, 손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사야 했지만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대로를 벗어나 연결된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방향이 달랐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밤을 집어삼킨 캄캄한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져내려왔다.
어쩌면 검정 물감으로 된……. 빗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검은, 반타블랙 물감이 만들어졌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빛조차 흡수해 버리는 검은 색, 세상은 지금 반타블랙으로 물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스크를 내리고 입김을 불었다. 12월 초, 차가운 공기 속으로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다 이내 사라졌다. 입 속으로는 빗물이 떨어졌다. 빗물이 얼굴을 쓸어내리고 나는 더 큰 숨을 모아 하늘에 대고 숨을 뱉었다. 하얀 입김이 검은 하늘 속으로 퍼져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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