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덩굴 담벼락
예닐곱 살 때 쯤 살았던 동네엔 그 동네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못 사는 축에 속해 고급 주택이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마당이라고 하기엔 정말 넓은, 정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은 대지(대략 250평쯤?)에 붉은 벽돌의 양옥 2층집이 도로와 골목을 잇는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80년대 지방 도시의 풍경에서는 흔치 않은 디자인의 집이었는데 대체로 그런 정도의 부잣집이라고 하면 동네에서 목소리도 좀 내고 그랬겠지만 그 집 사람들은 주변과 왕래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어린애들은 그저 그 집을 2층 부잣집 혹은 그네 있는 집(2층 테라스에 큰 그네가 있었다)이라고 부르곤 했다. 어른들은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었는지 그저 서울 사람들 혹은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 집의 특징이라면 정원이 넓고 구조가 독특한 2층 양옥이라는 것 외에 담이 굉장히 높았다는 점인데 담 위에는 도둑을 막기 위한 방어용 창살이 달려있었다. 그 당시 보통은 유리조각(주로 깨진 박카스나 전구 등)을 시멘트에 발라 고정시켜 놓고는 했는데 그 집의 방어용 창살은 꼭 스위스 용병대의 창끝처럼 뭔가 모르게 근사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 창살이 마음에 들어 길을 걷다가도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는데 그것 말고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그 집을 둘러싼 4면의 담벼락 중 볕이 들지 않아 늘 축축한 기운이 감돌았던, 담쟁이덩굴이 전면을 휘감았던 바로 그 담벼락이다. 특히 여름날 그 담벼락에 몸을 바싹 붙여, 얼굴까지 옆으로 돌려 귀를 댄 채 천천히 숨을 쉬면 시원한 기운이 무릎께서부터 올라오곤 했다. 그 시원한 기운을 느낌과 동시에 뺨과 살에 닿는 담쟁이덩굴의 거친 잎사귀 감촉에 정신을 집중하면 나는 금세 현실을 빠져나와 상상의 공간으로 내던져졌다.
주로 흰 말을 타고 스위스 용병대(용병이라는 말은 몰랐기에 나 자신을 ‘병사’라고 지칭하곤 했다) 일원이 되어 유럽(주로 토요명화에서 봤던 어떤 장면)의 어딘가를 달리는 상상이었다. 먼 여정의 끝에는 언제나 성이 있었다. 그 성에는 공주가 살고 있을 때도 있고 거대한 용 혹은 머리가 홀딱 벗겨진 매부리코의 마녀가 살고 있을 때도 있었는데 간혹 말하는 거대한 두꺼비가 나올 때도 있었다. 그 거대한 두꺼비는 수수께끼를 내곤 했는데 내가 아는 수수께끼라고 해봐야 주로 형, 누나들에게서 주워들은 시답잖은 것들로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같은 질문들이었다.
나는 답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척 연극을 하곤 했는데 마지막에는 언제나 내가 답을 맞히든 그렇지 않든 두꺼비는 날름 나를 삼켜버렸다. 그러면 나는 두꺼비 뱃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대개 만화영화주제가를 불렀는데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잠시 뒤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면 정말로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처음부터 봤던 걸까? 그녀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외모에 2층 테라스 담에 기대어 웃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간장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그 누나를 마주칠 수 있었다.
심부름 갔다 오니?
네
무슨 심부름?
품고 있던 간장을 앞으로 내밀어 누나에게 보여주었다.
자주 와도 돼.
네?
우리집에. 마당에 철봉도 있고 큰 개도 두 마리나 있어. 너도 들어서 알지? 대문 지나가면 막 짖고 그러잖아.
네 알아요.
누나는 어딘가 아픈 낯빛이었지만 사람들이 험담하던 것처럼 정말 휠체어를 타고 다니거나 아예 한 쪽 다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누나는 내게 다음 주 토요일에 카스텔라하고 메론 먹으러 오라는 말을 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나는 한참이나 서서 누나를 지켜보다 집으로 돌아갔고 누나의 말대로 카스텔라와 멜론을 먹으러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두 번 2층 테라스에 있는 누나를 봤을 뿐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
어른이 되고 다시 가보았지만 재개발이 된 후여서 옛 풍경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80년대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 무리라고 생각 하면서도 가끔 시골이나 지방 소도시에 갈 일이 있으면 그런 담벼락의 집이 없는지 여전히 찾아보곤 한다. 어쩌면 그 집은 내게, 어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공간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거대한 공간이 주는 자극 그리고 상상.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즐거운 놀이였고 축복이었다.
그렇게 좋은 집에 살지는 못했지만 그런 집이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있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리고 그 담벼락은 나만이 만들어 낸 게이트였으리라. 그 집의 현관문을 열고 샹들리에가 멋들어진 거실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나는 담쟁이덩굴 담벼락을 통해 거대하고도 근사한 상상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담벼락 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던 축축한 습기 내 뺨에 거칠게 부딪히던 담쟁이덩굴 잎사귀와 상상의 나라. 나는 이제 담벼락이 없는 오피스텔에 살고 있지만 가끔 그 시절의 담쟁이덩굴 담벼락을 상상하곤 한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의 축복의 유산을 받았던 것으로, 그것이면 되었다고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