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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뚜두 May 24. 2022

하루에 기분 좋은 추억 하나

찢어진 우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우산 검정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비가 올 때면 가끔 저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표현이 재밌거니와 멜로디가 흥겨워 그러는 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한 우연한 만남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러는 걸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등굣길의 어떤 추억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6시가 좀 넘어서였을까? 엄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나는 막 KBS2에서 명탐정 번개를 보는 중이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때는 집집마다 일반전화기가 있던 시절이었는데 우리집 전화기는 노란색 바탕에 검정 버튼의, 1500원에 사온 뜨개실로 만든 핑크핑크빛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명탐정 번개를 좋아했던 나는 TV시청에 집중하고 싶어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전화벨이 죽어도 그치지 않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왜케 전화 안 받고 지랄이야. 또 만화 보고 있었지?

아 왜 또?

우산 갖고 26번 정류장으로 빨리 나와! 5분 안에 안 나오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뚝!!

둘째 누나의 불호령과 호출이었다. 창밖을 보니 한여름 6시 밖에 안 됐는데도 세상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어두컴컴했고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누구야? 엄마가 물었다.

누나가 우산 갖고 나오래.

아이고. 참, 아침에 우산 안 갖고 갔지? 나도 깜빡했네. 신발장에 큰 우산 하나랑 작은 우산 하나 가지고 가.

두 개나?   

큰 우산 조금 찢어진 거야. 두 개 가져가.

지금 가?  

그럼 언제 갈래? 지금 당장 비 맞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갔다 와!


나는 우산을 들고 투벅투벅 거리로 나왔다. 우리집은 작은 하천 옆에 있었는데 벌써 물이 불어 제방 높이의 반 이상을 잡아먹은 뒤였다.

언제 이렇게 비가 왔지?

급하게 흘러가는 하천의 물을 보며, 수풀 속 둥지가 비에 잠길까 걱정인 이름 모를 새들의 날갯짓을 보며 누나가 말한 정류장으로 향했다. 누나가 말한 5분 주파의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제대로 찾아가긴 했는지 누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비슷한 체형의, 비슷한 바가지 머리(?) 그러나 앞머리가 조금은 더 긴 여학생이 정류장 앞 전파사 간판 밑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다가가 서둘러 우산을 내밀며 말했다.

우산 왜 안 가져갔어?

응? 어머. 넌 누구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누나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그제야 우리 누나가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이선희가 자주 쓰던 자줏빛 둥그런 안경테를 쓰고는 빗물에 젖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앗... 저기

사람 잘못 봤구나? 그렇지?

네.

우산 들고 마중 나왔니?

네.

착하네. 잘 찾아봐.

네.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나를 찾았다.

좌우, 앞뒤 쭉 돌아다녔지만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뭐지? 기다리다 집으로 그냥 갔나?’    

한참을 더 찾다가 누나 찾는 걸 포기했다. 그 시절엔 핸드폰이 없었기에 서로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와 누나는 한 정거장 텀을 두고 서로를 찾고 있었다. 내가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하자 누나가 내게 손짓하더니 물었다.

왜 찾는 사람이 없어?

네. 없어요. 여기 있겠다고 했는데...

그럼 저기 아래 정류장인가 보다. 거기로 가봐. 아마 거기 있을지도 몰라.

밑에요?

응, 거기 왜 큰 과일가게 있잖아. 저기 위로는 한참이나 가야 돼서 거긴 아닐 것 같고.

그러면 그쪽으로 가 볼게요.  

그래? 그럼 누나랑 같이 갈래? 누나도 그 옆에 있는 학원 가야 되는데.

정말요? 그럼 같이 가요.

초등학교 4학년(?)인 내게 누나는 다 큰 어른 여자 같아 보였다. 교복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가슴도 있었고 키도 제법 컸고 무엇보다 말하는 게 어른 같았다. 누나는 호수돈여고를 다닌다고 했다. 피아노를 칠 줄 알고 학교에서 전교 부회장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잘난척을 많이 하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 그건 내가 이것저것 캐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우산 하나를 같이 쓰면서 걸었고 누나는 내가 젖지 않도록 어깨를 감싸 안고 내 보폭에 맞춰 걸어주었다. 만원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버스 안에서 우리를 내려다 볼 때면 나는 고개를 돌려 왠지 모르게 웃어주었다.

누나에게는 좋은 냄새가 났다. 샴푸 냄새였을까? 아니면 곱게 다림질한 교복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였을까. 내가 누나를 학원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설 때 누나가 날 불렀다.

얘, 잠깐만. 이거,

누나가 내게 낑깡 두 개와 ABC 초콜릿 3알을 주었다.

조금 녹았는데 냉동실에 넣었다가 먹으면 맛있어. 너 참 착하다. 다음에 만나면 누나가 맛있는 떡볶이 사줄게. 저기 시장 안에 맛있는 떡볶이집 있어.  

나는 누나에게 부끄럽게 인사하며 얼른 길을 돌아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도착하자 누나는 비에 흠뻑 젖은 채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너 이 새끼!

나는 명탐정 번개도 보지 못하고 욕만 배터지게 먹었다. 저녁에는 구수한 청국장찌개가 나왔다.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여름비는 어느새 그치고 하천에는 제법 불어난 물이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둔 초콜릿을 꺼내 먹으며 한참이나 걸었다.

속으로는 누나의 교복 조끼에 걸려있던 명찰 속 이름을 되뇌었다. 한. 송. 연.

참 예쁜 이름이었다. 우산 오른쪽 부분이 조금 찢어진 상태였는데도 누나는 자신이 오른쪽에 서서 걸었다.


이슬비는 아니었어도 맞을 만한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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