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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뚜두 Jun 03. 2022

하루에 좋은 추억 하나

전망 좋은 방 <야한 비디오를 찾아서...>

기성(가명)이네 집 비디오 플레이어는 일제였는데 테이프를 넣는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작동을 시킬 때마다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일단 빨간 버튼을 누르면 로보트태권V의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훈이가 타고 다니던 비행접시가 안착하는 것처럼 비디오 플레이어의 뚜껑 역시 위로 열리며 테이프를 받아주는 구조였다. 나는 그 뚜껑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드르륵 척!

기성이가 빌려온 테이프를 조심스레 밀어 넣은 다음 살짝 힘을 주며 뚜껑을 닫았다. 

뷔~우융 

‘과연 그 형이 슬쩍 흘린 대로 정말 그런 비디오일까?’ 

아마 나를 포함해 기성, 상명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온갖 호기심에 들끓을 국딩 6학년이 되었으니 그 또래 남자애들의 정신 수준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테이프를 집어 먹은 플레이어가 서서히 화면을 보여주기 시작하자 우리는 터질 듯한 흥분을 감추지 못해 TV에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호환 마마 어쩌고, SKC가 어쩌고가 흐르는 동안   

야 니네 이따가 떡볶이 사야 된다.

아 사 사! 산다니까. 만두도 사줄게. 

기성이가 지네 집 비디오 어쩌고 하면서 생색을 내자 옆에 있던 상명이가 짜증난다는 투로 답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앉아 언제쯤 그 장면이 나올까... 상상하는 중이었다. 

이제 갓 군대를 전역했을까 싶은 정도의 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 비디오테이프를 살짝 뺐다가 옆에 있던 누나의 눈치를 보고 도로 넣으며 말했다. 

‘스... 아 이거 X나 야하다고 하던데?!’ 

인디아나존스, 엑셀런트 어드벤처, 공작왕 등 액션물에 눈을 돌리고 있던 우리들은 그 형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마음을 빼앗겼다. 

기성이가 자신의 주걱턱을 허공에 돌리며 내게 신호를 보냈다. 

너도 들었지?

응...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상명이도 거들었다. 

나도 들었어. 씨바 X나 야하다고?

화들짝 놀란 기성이가 큰 소리로 떠드는 상명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븅신아. 조용히 안 해!

상명이는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호흡을 고르며 가게 아저씨 눈치를 살폈다. 아저씨는 반납한 비디오를 되감고 또 사람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테이프를 집으려다가 만 형이 우리들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지가 맡아놨다는 뜻인가?’ 

잠시 뒤 형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려고 할 때 형의 애인으로 보이는 곱창 헤어밴드 누나가 형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아 뭐해? 빨리 물어 봐. 시간 없단 말야 지금. 

아, 알았어. 물어볼게. 

멈칫하던 형은 얼른 카운터에 있는 주인아저씨에게 가서 말했다. 

저기, 비오는 날의 수채화 있어요? 은경아 맞지? 비오는 날 수채화. 

아 맞다고. 몇 번 말해.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부를 뒤적이더니

좀만 기다려. 안 그래도 아까 내가 전화해놨어. 지금 온다 그랬거든? 한 10분만 기다려. 

기다려야 된다고요? 

형이 짜증난다는 투로 말을 했지만 결정권은 누나에게 있는 듯했다. 

기다릴게요. 대신 기존 연체료 500원 깎아주세요   

진짜 운 좋았다 그지? 

그러게. X나 야한 비디온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빌려주냐. 아무리 얘네 아빠가 심부름 시켰다고 해도 그렇지. 안 그러냐?

기성이와 상명이는 신이 나서 오는 내내 쫑알거렸다. 


영화 시작 30분이 지났을 쯤 우리는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는 지루한 풍경과  호텔 장면, 하등 쓰잘데기 없는 내용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피렌체라는 도시, 전망이 좋은 방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내용. 고모인가 누구인가 고지식해 보이던 여자와 웬 젊은 여자 그리고 그녀 곁을 맴돌던 한 남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했다. 그 영화에는 끝내 야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우리들이 상상했던, 최소한의 베드씬 같은 것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두 남녀 주인공이 딥키스나 제대로 했을까?  

와... 뭐냐 X발 이거. 

40분 쯤 지나고 상명이가 참다못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기성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일어서더니 토스트를 굽겠다고 냉장고에 있는 식빵과 케첩을 꺼냈다. 

뭐에 홀렸던 거지 싶다. 어쩌면 그 형이 빌리려던 테이프는 전망 좋은 방이 아니라 그 옆에 좀 더 튀어나오다 만  그 테이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우리에게 오려 했는지도.... 짜증이 제대로 오른 상명이가 차라리 무릎과 무릎사이를 골랐어야 했다고 말하자 기성이가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공중에 휘두르며 외쳤다. 

야 이 미친놈아. 그걸 아저씨가 빌려주겠냐?  

그때 우린 왜 그렇게 어수룩하고 미련했을까? 정말 그렇게 야하다면 왜 15세 관람가로 책정됐지 왜 생각을 못했던 걸까. 정말로 뭐에 홀렸던 게 틀림없다 ㅎㅎ  

어른이 되어 EBS 명화극장에서 다시 그 영화를 봤다. 그제야 헬레나 본 햄 카터라는 여자 주인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용도 결코 나쁘지 않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달이 지나 우리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그 뒤로 각기 다른 중학교로 배정을 받아 다시는 함께 모이지 못했다.  

기성이와 상명이도 저 영화를 다시금 볼 기회가 있었을까? 비디오가게가 사라져버린 요즘, 가끔 그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어린시절의 환상과 모험, 추억이 깃들어 있던 그곳.  

그리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시절의 추억, 오늘도 그 하루의 기억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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