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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랑 Sep 16. 2020

맛있게 책 읽은 밤

'태도의 말들'. 독서모임을 하고 온 날

주기적으로 독서모임을 하고, 직업상 하루 종일 수업을 해야 해서 말할 기회가 참 많다. 하지만 그런 일상이 지치거나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말을 한다는 것은 큰 카타르시스이자 자기표현의 핵심이 되는 것이고 나에게 있어 듣기보다 말하기가 훨씬 더 적성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 분위기를 띄우고 큰 목소리로 말하는 역할이 그리 싫지는 않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기분도 썩 괜찮다. 또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수다는 빼놓을 수 없는 인생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독서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이 모두 잠들어있던 밤이었다. 모임에서 읽었던 책 내용을 정리하고 회원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며 하루를 마무리한 후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순간 굉장히 허기진 기분이 들었다. 배가 고픈 것과는 확연히 다른 허기짐이었다. 마치 하루 종일 열심히 노동을 한 후 느껴지는 배고픔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온종일 쉴 새 없이 에너지를 쏟고 난 후에 ‘꼬르륵-’하는 소리를 내듯이 어떤 진동을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 평소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날, 너무 많이 말한 날에는 어김없이 마음이 더부룩하다. 적당히 말해도 될 것을, 적당히 만나도 될 것을 왜 이렇게 욕심부렸지? 소화가 덜 된 말들 때문에 속이 아팠다.*          



아, 내가 너무 많은 말을 내뱉었구나.

      

그 날은 나의 의지보다는 모임 내에서 주어진 역할에 따라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었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조율하고 정리하는 역할까지 했어야 했다. 어색하게 비어있는 틈을 메우고자 원했든 원하지 않든 하고자 했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말을 꺼냈던 날이었다. 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니 내가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한꺼번에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잔뜩 불었던 풍선을 놓쳐 바람이 휙-하고 빠져나가듯, 갑자기 쪼그라드는 심장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 적당히 숨겨놓았던 날것의 감정까지 빼낸 기분이었다. 그 덕에 온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머리가 아파왔다.   

    

무엇으로든 빨리 채워야 했다. 손끝부터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며 온 세상이 텅 비어버린 고독함과 외로움이 밀려들 것만 같았다. 그때 내 책상 바로 앞에 꽂혀있던 소설책을 꺼냈다. 그리고 읽었다.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루 종일 근무 후 야근까지 마친 후 녹초가 된 몸으로 주린 배를 치우기 위해 야식을 시켜 먹듯 허겁지겁 책을 읽었다. 독서모임 책을 읽느라 읽지 못하고 나의 위시리스트에만 실어놓았던 책이었다.       


글을 눈에 담으며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씹어먹듯 책장을 넘기며 읽다 보니 어느새 배속 깊은 곳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이내 책을 읽는 속도는 원래의 속도를 되찾고 천천히 호흡을 따라 읽게 되었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책이 눈에 잘 들어왔다. 책은 기대 이하였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책을 읽었고, 난 채워지고 있었다. 문장 한 줄 한 줄 꾸역꾸역 읽으며 단전부터 차오르는 따뜻함에 온몸에 다시 온기가 드는 기분이었다. 또박또박 하얀 종이에 인쇄된 활자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고 그 날 그 책 한 권을 다 읽게 되었다. 이제까지 읽었던 그 어떤 책 보다 정말 맛있었다. 


참으로 소중한 순간이었다. 이제껏 뱉어냈던 말들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한 권의 책으로 채우는 기분은 참으로 따뜻했고 든든했다.      


우리는 때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말과 에너지를 타인을 향해 쏟아낸다. 어쩌면 너무 일상적으로 뱉어내고 있어서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가끔씩 대화 중 침묵이 생겨나는 순간, 밤에 자기 위해 눈을 감았는데 가슴 한 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땅속 끝까지 닿을 것만 같은 피곤함이 느껴진다면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은 소진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마음이 채워지길 바란다. 그것이 좋은 책일 수 있고,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날 만났던 책 한 권이 소중한 경험이 되어 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책상에 앉아한 권의 시집과 소설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이렇게 나에게 위로의 방법을 쌓아가는, 인생의 시계추가 점차 나의 속도에 맞게 흐르는 하루하루가 참 감사할 뿐이다.       



                        

*엄지혜. 태도의 말들. p.23. 유유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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