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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랑 Feb 14. 2021

주어진 생인가, 살아갈 생인가

『자기앞의 생』.에밀 아자르. 문학동네./『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그렇지 않아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넌 너무 어려서 이해를 못 하겠지만...”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자기앞의 생』267쪽-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다고 말하는 아이의 이름은 모모다. 모모는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모모의 정확한 이름은 모하메드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모는 회교도인이며 유태인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고 있다. 자신이 회교도라는 것은 알지만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한다. 갖고 있는 출생신고서는 실제 모모의 나이와 일치하지 않고 부정확한 서류로 인하여 모모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 모모를 키워준 로자 아줌마는 앞서 말했듯이 유태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다녀온 뒤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그녀는 양육비를 받고 매춘부의 아이들을 비밀리에 키워준다. 프랑스에서는 매춘부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법이 있어서 아이를 낳은 매춘부들은 믿을만한 곳에 아이의 양육을 맡겼는데 로자 아줌마는 은퇴한 매춘부로서 이러한 일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사랑해서 돌봐주는 줄 알았던 로자 아줌마가 매월 말에 본인의 이름으로 도착하는 우편환 때문에 맡아서 키우고 있다는 사실에 모모는 충격을 받고 엄마란 존재에 대해, 진짜 엄마가 누구인지 묻지만 로자 아줌마는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부모에 대해 솔직히 말해주지 않지만 진실로 모모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로자 아줌마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이름으로 우편환이 오지 않는 것을 알게 된 모모는 빈민 구제소에 가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자신보다 동생인 아이들을 돌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불확실하고 답답하고 온통 잿빛일 것만 같은 모모의 일상이지만 그의 곁에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래층에 살고 있는 이웃 하밀 할아버지도 그 중 한명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아버지, 선생님과 같은 존재이며 또 다른 생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삶에서 ‘사랑’이 갖는 의미에 대해 대화와 행동으로 모모에게 알려주고 그런 할아버지를 모모는 사랑한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할아버지를, 이제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조차 헷갈려하는 할아버지에게 ‘하밀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여기 누군가 당신의 이름과 존재를 기억하고 여전히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하는 모모를 보면서 우린 생의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렇듯 아무 사건 없는 듯 평범하면서 평탄하지만은 않은 모모의 일상은 로자 아줌마의 건강 악화와 생활고로 인해 조금씩 깊어진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병원에서는 나를 억지로 살려놓을 거야그런 법이 있단다뉘론베르크의 법이지너는 너무 어려서 모를 거다.”

난 뭘 하기에 너무 어려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아줌마.”     

-『자기앞의 생』255쪽-



열 살 남짓한 꼬마아이 모모는 단 한 번도 삶을 살아가기에 어렸던 순간이 없다고 말하며 모모 자신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온 로자 아줌마를 안아준다. 『자기앞의 생』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에 끌려다니고 회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기지 못할 삶의 무게에 때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싶은 순간에도 모모는 도망치지 않는다. 때때로 로자 아줌마를 외면하고 떠나버리고 싶다는 상상을 하지만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를 버릴 생각은 없다. 마약을 하며 순간의 쾌락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행복은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없으며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기 보다 이대로가 더 좋다하며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모모는 생 한가운데에 던저졌으나 그 이후에 눈을 뜨고 숨을 쉬는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직관적으로 알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자기 앞에 놓여있는 생을 피하지 않고 끌어안는다. 이러한 모모의 모습은 로자 아줌마가 마주하는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더욱 돋보인다.           



혹자는 모모의 이야기가 너무 우울하고 슬프다고도 말한다. 도저히 더 나아질 가능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 어제와 오늘은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집안에서 점점 노망나는 로자 아줌마를 지켜봐야하는 열 살 남짓한 어린 아이의 삶은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을 답답하고 힘겹게 한다. 하지만 “함부로 연탄재를 발로 차지 말아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묻는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그 누구도 함부로 모모에게 연민과 동정심을 가져선 안된다. 그것은 무례한 행동이며 오만이다. 모모는 순간순간 생이 주는 선택의 기회와 사건에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며 도망치지 않고 마주한다. 그에게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生’이다. 살아가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의 작가 ‘에밀 아자르’ 의 삶을 살펴보면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나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내가 삶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분명 우리는 삶에 조종당합니다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미디어를 통해여러분의 카메라를 통해 대중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기이한 현상은 사실 인간의 실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쨌든 작가의 창작물과 작가 자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작가는 자기 자신의 최고의 것을자기 상상에서 끌어낸 최고의 것을 책 속에 담고 그 나머지는앙드레 말로의 표현대로라면 한무더기의 보잘것없은 비밀은 홀로 간직하지요          


-『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문학과 지성사 p.109  -   


'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문학과 지성사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 그의 이름은 로맹 가리. 러시아에서 태어나 14살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 후 법학을 전공한 후 공군으로 입대하여 장교양성과정을 마친다. 후에 2차대전에 참가하며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소설을 써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는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컸다.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지만 프랑스에 대한 사랑이 매우 컸던 분으로 로맹 가리가 어렸을 때부터 “넌 위대한 작가가 될 거야. 프랑스 대사가 될 거다.”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군인으로서 활동하며 오랫동안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지만 매번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는 어머니 덕분에 군인으로서,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그는 드디어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어머니는 이미 2년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위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죽기 전에 2 백여 통의 편지를 써서 스위스에 있는 폴란드 친구 분에게 맡겨두었고 결국 본인이 원했던 꿈을 이뤄낸 아들의 모습을 미쳐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뒤늦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된 그는 정신적 충격을 받지만 이를 이겨내고 불가리아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외교 활동과 작가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남겨둔 2백여 통의 편지를 두고 로맹 가리는 ‘탯줄이 계속 작동하게 해두었다’고 표현하였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지닌 헌신, 사랑을 그는 작품 속에 ‘여성성’이란 주제로 스며들도록 하였던 것을 보면 그에게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고백한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한 게 아닌가 싶다’란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본인의 죽음을 숨기면서 자식의 꿈을 응원했던 어머니의 간절했던 사랑과 소망. 어쩌면 로맹 가리가 삶을 선택할 때에 마음 속에서 강하게 자리잡는 이정표 같은, 습관적으로 거쳐야 하는 삶의 거름망같았던 ‘생’이었을 지도 모른다.      



로맹 가리가 삶을 살았다는 확신보다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한다고 느끼게 했던 또다른 요인에는 비평가 집단이 있었다. 이미 비평가들 사이에서 자리잡은 ‘로맹 가리’라는 프레임에 그의 작품은 새롭게 해석되거나 읽혀지지 않았다. 아마 그의 극적인 삶(다양한 직업, 진 세버그와의 결혼과 이혼 등)에 가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이 순수하게 읽혀지지 않는 것에 대한 피로감, 작품과 작가는 별개로 작품으로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열망, 늘 새롭게 선보이고 싶은 작가로서 지닌 즐거움이 비평가들에 의해 난도질 당했을 때에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이다. 가면. 타인의 프레임에 갇혀 습관적으로 이끌리듯 살아가는 삶이 아닌 대상에서 주체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는 여러 필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은 프랑스 문학계에 혜성같은 신인의 탄생으로 찬양받고 비슷한 시기에 로맹 가리는 『이 경계를 넘어서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를 내놓지만 비평가들은 두 작품이 동일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죽기 직전까지 다른 필명은 로맹 가리 본인이었음을 밝히지만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동일인물이란 사실은 그가 권총 자살을 한 후 몇 달 뒤에야 세상에 알려진다.      

  살아가지 못하고 삶에 의해 살아가는 대상, 타인이 바라보는 편견에 갇혀 있었던 작가는 모모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전과 허구가 섞인 채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이 제대로 비평되지 못하는 것을 속상해 했던 로맹 가리가 낳은 모모는 작가와는 달리 생을 온전히 살아가며 우리에게 뜨거운 메시지를 던진다.          



『자기 앞의 생』은 소설 그 자체로서 온전히 감상한 후 소설의 작가 에밀 아자르의 삶을 만나보길 권한다.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의 삶을 알고 난 후 다시 만나는 모모는 독자들에게 어떤 물음을 던질것인가. 독자는 ‘생’에 대해서 오랫동안 되뇌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삶의 대상이 되는가, 주체가 되는가. ‘어떠한 것을 알게 어린 나이라는 것은 없어요.’라고 말하는 모모의 용기를 우리는 닮아갈 수 있을 것인가.      



『자기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는 누구보다 삶을 살아가고, 주어진 생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휘하여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로맹 가리가 원했던 모습일 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나 사랑해야 함을 다짐하고 다시금 사랑을 찾아 나서는 모모. 그리고 모모를 완성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며 스스로 삶을 완성하는 로맹 가리의 삶. 



작가는 말하고 있다. 아니, 모모는 이야기한다. ‘사랑해야 한다’고. 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선택하고 지켜야한다고 말이다. 지금 당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삶에 소유당한 채 습관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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