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살여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까 Apr 09. 2023

5. 아, 사랑스러운 메이

방콕에서 자살하기

얼음을 넣은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차근차근 아까 공항에서 직원이 말해준 장소를 인터넷에서 확인해 보았다. 택시라던가 호텔 예약 같은 서비스들이 영 미덥지 않았으나 그래도 내가 미리 올 줄 알고 줄줄 읊어주던 공항직원이었던 지라 그래도 그 방면으로는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 혹시나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본 것이다.


그러나 역시나 그가 준 정보들은 내 기대에 못 미쳤다.  한국에서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라 굳이 태국에서까지 와서 할 일은 아니다 싶었고 아까 들은 기차역은 찾아가기가 좀 고역이었다. 사진을 보아하니 풍광이 카메라에 담고 싶은 정도로 예뻤고 그냥 셀피를 찍는 척하다가 기차에 들이 받히기에는 충분한 곳 같았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죽기로 워낙 유명한 곳이니 역직원이 지키고 있다가 통제를 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해보지 않고는 제대로 죽을 수 없는 법,  그래도 위험부담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자살처럼 보이지 않는 확실한  자살, 그게 내 신조다.


맥주가 거의 바닥에 닿아갈 즈음에 아까 그 여종원이 공손하게 다가와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가슴팍에 '매아(Mei)'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본명인지 아니면 직장에서만 쓰는 가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시절 내가 좋아하던 바이올리니스트와 이름이 같아서 좀 반가웠다.


마음 같아서는 아까 공항에서처럼 이 근처에 어딘가 죽을 만한 곳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영어가 잘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메이는 가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난 가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메이는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보고 허리를 반쯤 숙이고 쳐다보았다. 어색한 시간이 잠시 흐르자 메이가 입을 열어 말했다.


"클럽?"

"....... 클럽?"

내가 반문했다. 방콕에 와서 클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난 한국에서도 클럽에 가본 적이 없었고 클럽 자체에 그냥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노."

내가 모질다 싶을 정도로 단언하여 말했다. 메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뱅콕 클럽, 나이스!"

"......."

안 간다니까 이러네 이 사람이....

"김미 김미 유어 컴퓨터."

영문은 몰랐지만 나는 메이에게 컴퓨터를 내밀었다.


그리고 능수능란한 손가락질로 어떤 클럽을 하나 찾아주었다.

"컴 컴, 나이스 나이스"

그러더니 뒤에서 누군가 메이를 부르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는 더 봉사를 해드리지 못해 너무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뒷걸음질로 바를 빠져나갔고 그 뒤를 이어 얼굴이 하얗고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메이의 자리에 섰다.


메이에게 팁이라도 주고 싶었는데, 저 사람한테 팁을 주면 메이에게 전달이 될 수 있을꺄?





이번엔 시차적응이 너무 힘들었다. 밤이 늦도록 도무지 잠이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인터넷 동영상을 돌려보면서 시간을 대충 보내고 있었는데 마침 메이가 찍어준 클럽 생각이 났다. 평생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니 죽기 전에 한번 정도 가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잠을 자든 클럽엘 가든 어차피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은 매한가지니까.


인터넷에서 아까 메이가 찍어준 곳을 확인해 보았다.  파브(fab)라는 이름의 클럽이었고 시내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호텔 리셉션을 통해 부른 택시를 타고 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입구의 조명은 단출했고 별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태국이나 한국이나 옷을 후줄군하게 입은 30살이나 된 남자를 이렇게 쉽게 들여보내주지는 않을 텐데.


입구와는 달리 내부는 아주 화려했다. 테이블이 족히 30개는 되는 것 같았고 춤을 추는 무대는 축구장만큼 넓었다. 그 축구장 만한 공간에서 셀 수 없인 많은 팔들이 산호에 난 촉수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약간은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요상한 음악들이 계속 흘러나왔고 줄곧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레이저빔이 눈을 사납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나이트클럽을 한번 안 가봤으니 한국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였다.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우선은 비어있는 것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않았다. 그러자 멋지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다가왔고 난 잘 마시던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있는 내내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정말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허파가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종업원이 칵테일을 가져온 줄 알고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낯익은 여자얼굴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뜻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찬찬히 훑어보니 호텔에서 만났던 메이였다. 그러던 사이 종업원은 내가 시켰던 하이볼과 함께 메이에게는 위스키인지 코냑인지 모른 음료가 들어있는 잔을 건네주었다.




"재미있는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메이가 내 앞에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메이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더 놀라웠다.

"엇, 영어를 할 줄 아시네요?"

"잘은 못하지만 좀 해요. 싱가포르에서 좀 오래 일했거든요."

"그렇다면 그 이름도 혹시....?"

"싱가포르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이죠. 알아요?"

"알다마다요."

대만에서 자살에 실패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처럼 온몸에서 기운이 폭 하고 나왔다. 이렇게 어이없고 황당할 때도 죽음에서 부활한 느낌이 드는가 보다. 메이가 내 마음을 의식한 듯 말했다.

"그 호텔에선 제가 영어를 하는지 알면 안 돼요. 그러면 저는 돈을 더 받아야 되는데 호텔에선 그러긴 싫으니까 아마 내보내려고 할 거예요.  나가면 다른 곳에서는 일을 할 곳이 없어요. 지긋지긋한 싱가포르에는 돌아갈 마음이 없고요."

나는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왠지 오실 것 같았어요. 오늘 여기서 저랑 같이 죽지 않을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