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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인간 Dec 27. 2021

멀리서 봐야 보인다

여행의 권유

사각사각...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선을 하나씩 그어 나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등 뒤에서 선생님이 다가왔다. “멀리서 봐야 보여요. 화실을 한 바퀴 돌면서 벽에 걸린 다른 그림들을 잠깐 보고 오시겠어요?” 긴장된 목과 허리를 풀면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왔다. ”이젤에서 두 세 걸음 뒤에서 한 번 보세요.” 어딘가 어색한 그리다 만 손이 보였다. 어두워야 할 부분이 충분히 어둡지 않아서 입체감이 없는 데다 새끼손가락이 길어 균형이 안 맞았다. “가까이서 너무 오래 집중하면 잘못된 부분을 볼 수 없어요. 뒤로 가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셔야 해요.”

그렇게 몇 번 멀리서 보고 수정하기를 반복하자 비로소 ‘손’ 다운 그림이 그려졌다. 고개 한번 안 돌리고 열심히 그렸는데, 그게 독이 됐다. 작은 부분에 몰두하다 보니 전체적인 윤곽을 못 읽은 거다.  

    

미술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일이 잘 안 풀려 꽤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고민하다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 망했다’ 하며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는데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심에서 멀어져 간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릿속이 정리가 됐다. 어지럽게 얽히고설켜있던 선들이 점점 덩어리가 되면서 결국 그림 속에 묻혀 버렸다. ‘그래, 그동안 해온 일이 다 잘못된 건 아니지. 조금 수정하거나 돌아가면 되는 거야.’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도착해서 돌아갈 때까지 그림은 더 명확해졌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결국 문제는 약간의 운과 시간이 해결해 주었고, 어둡지만 그럴듯한 그림자로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인생의 그림을 멀리서 볼 기회는 여행에서 생긴다. 

구체적인 작업에 오랫동안 몰두하다 보면, ‘내가 왜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지?’ 할 때가 있다. 그땐 쉬어야 한다. 시야를 돌려 적당한 장소를 찾고, 그곳에서 내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처음엔 호랑이를 그리려고 시작했는데, 한참을 그리다 보니 고양이 같기도 하고, 개 같기도 하다. 갸우뚱하다가 ‘에이 이참에 고양이나 그려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사는 대로 생각하는 거다. 뭔가 그림이 이상해진다 싶을 때 물러서서 점검하고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 해야 할 일들에 치여서 내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살다 보면 인생 말미에 내가 평생 그려온 이상한 그림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발견하면 고칠 수도 없다. 만약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과감하게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한다.      


인생을 좋은 그림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림은 선을 잘 써야 한다. 지우개로 지워도 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해도 안되고, 너무 흐리면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가로 선이나 세로 선처럼 한 방향으로만 선을 사용하면 그림에서 고집, 성깔 같은 게 보인다. 가로선, 세로선, 사선 등을 적절히 섞어서 써야 그림에 볼륨감도 생기고 따뜻한 온기와 표정이 나타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강약을 조절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다 보면 인생이라는 그림에 색과 온도가 더해져 생기가 돌 것이다. 실수로 여러 번 그어 생긴 잔 선들은 결국 그림을 풍부하고 멋스럽게 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긴 호흡으로 멀리서 봐야 제대로 보인다

.     

재밌는 건 멀리 갈수록 큰 그림이 보인다. 퇴근해서 지하철을 타는 것만으로도 회사 안에서 애쓰는 내 모습이 짠하게 보인다. 강원도 산골짜기로 여행을 가면 도시에서의 삶이 보이고, 더 멀리 해외로 나가면 한국인으로서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우주 밖으로 가면 그 형태는 공허하고 의미 없는 작은 점이 되고 만다.      


적절한 여행은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잠시 벗어났던 길에서 되돌아오게 해 주고, 인생에 목표한 곳까지 갈 수 있게 해 준다. 망친 것 같았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게 해 준다. 그래서 별문제가 없어도 한 번씩 떠나야 한다. 내가 가진 문제를 나 스스로 알아차리긴 어렵다. 그렇다고 남이 그 문제를 지적해 주면 이미 늦는다. 그리고 아프다. 타인은 내가 하나하나 그어온 선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떠나야 한다.         

  

겨울엔 눈 덮인 태백산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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