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더 이상 로맨스를 꿈꾸지 않는다. 아마 도깨비까지는 꿈을 꿨던 것도 같다. 모유수유를 마쳐 진이 빠진 채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도깨비... 김신... 아니 공유 씨. 실상 로맨스를 꿈꾸기는 그때보다 지금 상황이 훨씬 낫다. 더 이상 2~3시간마다 생존을 위해 거세게 울어대는 아이도, 그 울음보다 먼저 싸해진 가슴을 붙들며 축축해진 수유패드를 빼 부정할 수 없는 포유류 어미의 숙명을 따르던 일상도 이제 내겐 없으니 말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자유부인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더 이상 멜로드라마 남주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로써 내가 진정 아줌마가 되었음을 느낀다면 좀 생뚱맞을까?
대신 요즘 나는 잘 생기고 인성까지 훌륭해 보이는 아들과 조카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작은 정해인이었던 것 같다. 밥은 잘 사줄 수 있지만 예쁘지가 않아서 게다가 열 살이나 차이가 나서 로맨스가 아닌 '참 잘 자랐다, 저 어머님은 좋으시겠다, 어떻게 키우셨을까?' 이 마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얼굴 천재 차은우가 나왔을 때도 외모에 감탄하다 정신 차리고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몇 년생인지 검색하는 것이었다. 97년생…. 내 학번이 98학번인데 내가 첫사랑에 실패하지 않고 끓어오르는 정열을 불 살랐다면 저 나이 아들을 두었겠구나 싶은 마음이 먼저인데 어찌 로맨스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하여 이 잘 생긴 남자들의 이모인듯 엄마 같은 이상한 팬이 되어 장한 마음에 무한 응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실상 괴로운 것은 내가 아닌, 현실 속 나의 아들인 것이다. 빨래를 개는 내 옆에서 제 세계에 빠져 중얼중얼 놀이 중인 철부지 아이를 붙잡고 놀리듯 장난치는 더 철없는 엄마.
"서한아, 우리 아들도 언젠가 저런 삼촌들처럼 멋진 남자가 될텐데그치?”
“ 그럼 여자친구들이 서한 씨, 서한 씨 할 텐데"
물려준 유전자는 생각도 않는 이 철저히 주관적인 고슴도치 엄마의 질문을 보라. 어쩔 수 없는 팔불출 엄마임이 드러나는 이 지점 역시 내가 이미 아줌마의 다리를 건넜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놀리려고 서한 씨에 과한 애교를 넣어 간질거리게 했더니 미치겠는지 아이는펄쩍펄쩍 뛰면서도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 게 싫지 않은 모양새다. 부끄러워하는 아이를 꼬옥 안아주며 나는 나의 이 로맨스가 모성애와 책임감이 뒤 엉킨 정체 모를 감정이 된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 나는 너의 엄마가 되어 변해버린 나도, 감정도, 세상도 품을 수 있게 되었구나. 얼마나 다행이냐. 그래, 그깟 로맨스 따위 모성애와 인류애로 끌어안아 승화시킬 세상 단 하나의 장르인 나는 엄마다. 얼마쯤은 사실이고, 얼마쯤은 자조일 이 마음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목을 매던 그 오빠와의 로맨스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백일날 백송이 장미를 들고 한강 고수부지를 달려오던 그 순진한 오빠도, 그윽하고 위험한 눈빛 날리며 나의 식욕까지 잠재우던 그 치명적인 오빠도, 3초일망정 조승우였던 그 잘 생긴 오빠도 이제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내게 남은 오빠는 1초 만에 잠들어 코까지 고는 기행을 시전 하고, 밥 먹지 않아도 볼록 나와 있는 배를 미쉐린 타이어라 자랑하는 그저 흔한 옆집 아저씨가 되어 내 옆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제 살길 찾는 건 생존의 문제 아니던가. 국 끓여 먹지도 못하는 백송이 장미를 대신해 퇴근길 아내의 지령을 받들어 가성비 최고의 칭찬을 이끌어 낼 만한 싱싱한 대파를 안겨주고, 치명적이고 그윽했던 그 눈빛은 노안으로 초점을 잃은 지 오래지만 머리를 쳐 박고 아들과 눈 맞춰 레고를 조립하느라 사투를 벌이는 이 남자를 보라. 어디 감히 포켓몬 진화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보다 더 처절하고 눈물겨운 진화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언젠가 맞이할 그를 쏙 빼닮은 한 남자의 진화만 빼고 말이다.)
이게 어디 나만 느끼는 감정이겠는가. 이제 그때의 생기 발랄하고 싱그러웠던 한 여자가 사라져 버린 건 그 오빠에게도 매일반인 것이다. 천하에 재미없고 썰렁한 남자의 농담을 깔깔거리며 개콘급 리액션으로 선물하던 그 여자도,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찰랑 거리는 생머리, 탱글한 볼륨 웨이브, 지적인 칼단발 돌려가며 그의 눈에 새롭고 싶어 안달하던 그녀도, 화가 나도 할 말 안 할 말은 가리고 되도록 예쁘게 말하려 노력했던 교양 있는 그녀도 이제는 없다.(설령 그것이 내숭으로,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들을 따라잡기 위한 무리수였다 할지라도 그에게 좋은 말로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던 진심이 들어있던 것은 사실이니 완전히 내숭은 아니었다 주장하고 싶다.)
대신 이제 그에게 남은 건 하루종일 수다쟁이 아이와 씨름하느라 멘탈이 털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닫고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여자, 미용실은 고사하고 머리 감는 게 세상 제일 귀찮다며 냄새 많이 나냐고 정수리를 들이미는 게 일상인 여자, 할 말도 여전하고 안 할 말도 서슴지 않아 가끔 그의 맘에 비수를 꽂는 여자 김구라가 된 그런 억센 여자뿐인 것이다.
나의 이런 삼단변신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세세히 묻지 않아 정확히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아직 봄이 오면 프리지어를 가을이 오면 국화를 생일에는 작약을 들고 오는 여전히 꽃을 든 남자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쓴다고 까불어 대는 아내의 노트북 옆에 조용히 무선 마우스를 놓고 간다는 걸로 그의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슬퍼할 것은 없다.
"드르렁드르렁"
익숙한 나의 수면 디폴트. 내 움직임을 감지했는지 몸을 틀어 옆으로 눕는 이 애잔한 남자. 코끼리처럼 둔한 남자가 예민한 여자 만나 꿈꾸면서도 눈치를 보는구나. 침대 발치 이불에 쓸리는 버석한 당신의 뒤꿈치. 수면모드를 깨우고 어둠 속에 두드리는 쿠팡 검색어 '풋 힐 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