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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한 Mar 11. 2023

이혼 가정에서 자란 28살 청년의 삶

내가 가장 싫어했던 숙제는 '가족신문 만들기'였다.


4살 때 갈라섰다고 했다. 나는 부모가 미웠다. 현재의 나는 내가 아닌 엄마 본인을 위한 선택에 대해 고마운 마음 그뿐이다. 하지만 학창 시절의 나는 자식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둘의 결정이라고 함부로 판단했다.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는 내게 아무에게도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했다. 내게 이혼했다고 말하기도 전에 아빠가 없다는 걸 말하지 말라니,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았다. 가끔 보러 오던 아빠가 자주 안 오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건지, 아빠가 우리 집에서 안 자고 가니까 아빠가 없는 게 되는 건지 혼란스러운 나는 엄마의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는 눈을 보고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응 알겠어" 누가 잘 못 써버린 편지를 구겨버리듯이 마음이 구겨졌었다. 그렇게 나는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있지만 아빠는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매해 여름, 겨울 방학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그 숙제가 힘들었다. 몇 장 갖고 있지도 않은 셋이 찍은 가족사진을 오려서 붙여야 했고 나는 그 귀한 사진을 오려 붙이는 게 아까웠다. 그리고 문제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가족사진 속의 모습은 많아 봤자 3살이었다. 해본 적 없는 가족회의의 주제와 의견들을 지어내야 했고 어렸을 적 만났던 아빠의 모습을 꾸역꾸역 꺼내어 특징을 적어야 했다. 키가 162cm인 엄마보다 작았던 아빠는 178cm의 키 큰 아빠의 모습으로 꾸며냈다.


다른 아이들의 가족신문을 볼 때면 비참하고 창피했다. 화목한 가정의 모습과 가족 구성원이 도와 알록달록 다채롭게 꾸며진 그들의 신문은 내가 절대로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서러움 비슷한 것들이 어린 마음을 어지럽게 했더랬다. 그렇게 나는 다정한 가정의 모습의 가족사진을 만들지 못하게 한 내 부모가 미웠다. 그리고 얼른 제출하는 날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맘을 졸였다. 친구들끼리 잘 만든 가족신문을 가진 친구의 것을 궁금해하면서 내 것은 아무도 안 봤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숙제 검사가 끝난 후 나는 가족신문을 가지고 집에 귀가하면 바로 신문 속에 있는 우리 셋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같이 앨범에 있던 셋이 찍은 사진을 골라주며 어린 나보다 사진 속 장소와 추억을 알고 있을 엄마의 마음을, 이건 뭐라고 써야 하냐는 내 기운 없는 목소리에 "그냥 이런 식으로 써" 라며 별거 아닌 것처럼 얘기하던 엄마의 곤란함을, 매 년 만들어야 하는 가족신문 숙제 앞에서 답답함에 몰래 내쉬었을 엄마의 한숨을, 어린 나에게 괜스레 미안하고 속상했을 그녀의 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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