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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자Lee Dec 05. 2019

누가 읽어줄까 싶은 그냥 내 이야기

새해를 앞두고 적어보는 글

2019년 올해 나의 달력은 여섯 덩이로 나누어져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아이들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을 제외하고 네 권의 책을 번역했다는 말이다. 내년에 서른다섯이 되는 나는 두 아들의 엄마이자 새내기 번역가다.

나는 요즘 시대치고는 조금 이른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직장 다니는 친구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 해외여행도 다니고 SNS에 사진도 올릴 때, 나는 아이를 낳고 집에서 모유 수유를 하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자연분만에 모유 수유 1년 4개월씩, 그리고 그 귀찮다는 천 기저귀를 반년씩이나 썼다.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와 우리 엄마는 엄마가 아이 키우던 시절을 떠올리며 베이비 페어에서 60만 원짜리 프리미엄 천 기저귀 세트를 덥석 샀었다.

친구들은 내게 엄마가 되어서 대단하다고도 했지만, 공부 열심히 하더니 애만 키우고 있냐고도 했다. 전자는 빈말 같았고, 후자는 진담으로 들렸다. 당시 나는 직장을 다니다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을 내고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82년생 김지영’님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경력단절녀가 되고 싶었다. 모유 수유를 핑계로 회사에 사직서를 내러 갔을 때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회사를 안 다녀도 된다는 생각에 속으로는 흥얼거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요즘 잘나가는 oo 작가보다 더 '회사 체질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회사에서 뭐 하나 잘하는 것이 없던 나는 정말 육아가 체질인 듯했다. 큰 불만 없이 씩씩하게 아이들을 잘 키우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동안 끈기도 없고, 야근도 싫어하고, 꼼꼼하지 못해 상사에게 칭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이 튼실하게 잘 크니 지나가던 할머니들도 ‘엄마 젖이 좋은가 봐~’ 하고 나를 칭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내가 정말 육아 체질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경력을 단절했을지언정, 꿈은 단절한 적은 없었다. 나는 젖먹이 아기가 잠깐 낮잠을 잘 때도 항상 알바의 천국 같은 데를 헤매며 번역 일감을 찾았다. 한 달에 2만 원이 입금되든 5만 원이 입금되든, 항상 영어와 글쓰기, 그리고 번역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지냈다.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언젠가는,’을 되뇌이며 틈만나면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 둘 다 어린이집에 가게 되자, 오롯이 나 혼자 보내게 될 시간에 뭘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 게 하나뿐이었기에 고민은 오래 하지 않았다. 나는 번역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졸업 후 호기심에 한 번 도전했던 통번역대학원 시험을 다시 쳐보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다섯 시간이든 여섯 시간이든 내게 허락된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공부했다.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축복처럼 느껴졌던 공부였다.

다행히 합격 통보를 받았다. 스스로 너무 대견해서 눈물 흘리던 것도 잠시, 대학원 수업 시간과 아이들 등 하원 시간이 겹쳐서 도저히 다닐 수가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며 등록까지 마치고 힘겨운 일주일이 지났는데, 한 출판사에서 내가 번역한 샘플 마음에 들어했다는 연락이 왔다. 참 감사했다. 그렇게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휴학을 하고 바로 출판 번역가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때부터 아이들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책 번역을 의뢰받았다. 계약일과 마감일을 달력에 표시해 일정을 나누다 보니 기존의 월 단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역서 한 권을 맡으면 온통 책 생각만 하다보니, 번역 기간이 몇 주든 몇 달이든 물리적인 한 덩이로 느껴졌다.


내년에는 몇 권의 책을 번역하게 될까? 가능하다면, 더 부지런히 번역해 길든 짧든 여섯 권 정도 마감하고, 방학 때는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면서 총 여덟 덩이의 한해를 만들어 보자고 다짐해본다. 덩어리 같이 묵직한 부담감도 불과 몇 년 전 내 상황을 생각하면 설렘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 보면 일 년 열두 달이 온전히 열두 덩이가 되는 해도 오지 않을까? 그리고 내년에는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에게 경력 단절이 됐다고 해서 오랜 꿈까지 단절하지는 말라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응원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거창하지는 않아도 오래 간직해온 꿈을 이루고, 나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 많은 엄마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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