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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이시트콤 Jun 07. 2020

을로 일해도 인생을 저자세로 살지는 맙시다

예의바르고, 친절했더니 호구로 보더이다.

  얼마 전 제주도에서 렌트카 사고가 났다. 좁은 돌 길에서 앞에 오는 차량을 피해주다가 풀 숲에 숨어있는 돌부리에 조수석 문짝 두 짝에 큰 기스가 났다. 제주도에서 작은 기스 사고라도 사전에 업체로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 보험을 적용해주지 않겠다고 업체에서 우기는 경우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재빠르게 업체에 연락을 취했다. 


"사장님, 앞 차 피하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기스가 나서 사고 접수를 하려 합니다. 완전자차 들었으니까 수리비에 대한 면책금은 없는 것 맞죠?"


"무슨 소리세요. 단독사고는 보험 안됩니다"


"네? 단독사고는 원래 안되는건가요?"


"네, 안되요~ 수리비 100% 물어주셔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자차 보험을 들었던 것인데.. 수리비 100%를 물어야 한다니.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같이 다니던 친구에게 이 정황을 이야기해주었더니, 친구가 업체에 전화를 해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사장님, 계약서 상에는 자기과실 100%여도 300만원 한도 내에서 면책금 없다고 되어있는데 무슨 소리시죠? 보험사 어디 쓰셨는데요? 거기 전화해서 제가 알아봐도 되는거죠? 말 돌리지마시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해주세요. 확실히 완전자차 드신거에요?"


미친듯이 쏘아대는 친구의 말에 사장은 어버버 대기 시작했고, 제 3자는 빠지고 당사자와 이야기하겠다고 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내가 다시 전화를 하자 사장은 다시 기세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 3자는 빠지시라고 하시고요, 본인이 통화하세요. 어플 예약하실 때 분명 거기 단독사고는 안된다고 되어있어요. 통화로 더 얘기하고 싶지않고요, 차 가지고 오세요. 그게 순서고 예의입니다. 끊으세요."


계약서 상에는 단독사고는 보상이 안된다는 내용이 없었다. 무조건 보험처리 해달라고 주장하고 싶었으나, 나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 안된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러면 일단 가서 차 보고 말씀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라고 예의바르게 말하고 끊었다.

맞다. 친구는 상대하기 껄끄럽고, 나는 만만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사기치기 쉬운 호구로 보인 것이다.


결국 일이 해결되지 않은 찝찝한 상태로, 나는 겨우 휴가를 내서 갔던 소중한 제주도의 3일 중 2일을 이 사건에 대응하는 시간으로 날려버렸다. 부모님, 보험사 친구, 변호사, 아는 렌트카 업체 사장님 등의 지인들을 통해 증거를 수집하고 내가 수리비를 내지 않아도 될 근거를 만들었다. 그리고 휴차보상료에 대해 호구잡히지 않고자 업체에 가기 전 공업소 4군대에 들려서, 수리비와 수리소요 기간을 조사했다. 싸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렌트카 업체로 향했다. 


친절하고, 정중했던 톤앤매너를 버리고, 건조하고 단호하게 직원에게 물었다.

"계약서 상 단독 사고 예외 조항이 없는데, 왜 수리비 100%를 제가 물어야된다는건가요?"

차를 살피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표정을 살피더니, 눈을 피하며 답했다.

"수리비는 보험 처리하시면 되고요, 휴차료만 내시면 됩니다."


허무하고, 화가 났다. 난 논쟁을 위해서 소중한 휴가 2일을 모조리 날렸는데, 단호하고 건조한 말투 한 번에 해결이 되어버리다니. 문제 해결을 위해서 지인들과 논의하면서 들었던 공통적인 피드백이 생각났다.


우리 아들은 진짜 친절하고, 예의도 바른데.. 가끔은 너무 저자세야. 지금 넌 니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네 돈을 빼가려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야. 그럼 그 사람들이 너를 설득해서 그 돈을 빼가야지, 넌 왜 그 사람들을 이해해주려고 하니? 경청이 참 좋은 미덕이지만, 이런 경우에 너가 경청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은 너가 그 사람들 말에 수긍하고 있다고 생각한단다.

친구야, 너 이런 꼴 안 당하려고 더 비싼 돈 주고 완전자차 가입한거잖아. 근데 왜 이렇게 그 사람들 편에서 생각을 하려고 해? 니가 니 돈 한 푼이라도 지키려면 니 입장에서만 생각해야지. 니가 그 사람들 얘기 듣고, 이해해주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들 판으로 끌려가는거야. 그렇게 하면 절대 너한테 유리한 협상 못해. 


미생의 박대리가 생각났다. 그는 착하고, 배려심 많은 성격 때문에 협력업체의 말도 안되는 사정을 매일 봐주었고, 싫은 소리 못하는 박대리를 호구로 생각한 협력 업체는 그를 이용해 먹는다. 회사에서는 일을 갈무리 짓지 못하는 무능한 사원이었고, 협력업체에서는 동정에 호소하면 모든 실수를 눈 감아주는 호구였다. 답답하고 어리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남 같지 않다. 회사에서도 팀장님한테 몇 번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톤앤매너 좋고, 예의바르고 예쁘게 말하는 것 훌륭하지. 근데 너무 저자세일 필요는 없어. 우리가 일을 쥐락펴락 하려면 저자세이면 안 좋은 점들이 많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지? 취업 전까지의 나는 당당하고, 리더십 있는 모습으로 많은 친구들의 사랑을 받는 편이었다. 그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들은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친구들을 끌고 다니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 주장을 피력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내 이득 챙기는 것에 서툰 사람이 되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알고 있으시겠지만'을 입에 버릇처럼 달고 사는 저자세의 사람이 되었다.


물론 경청의 자세는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표와 주관을 잊어서는 안된다. 렌트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내가 관철시켜야 했던 것은 '계약서 내용대로 수리비는 낼 수 없다. 휴차비용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해달라.' 였다. 단독사고는 처리해줄 수 없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나는 '아 그래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와 같은 수동적인 답변이 아닌 '아니요. 계약서 다시 검토했고요, 저는 계약서 외의 내용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계속 우기시면, 이 부분은 민사로 넘기겠습니다. 민사 통해서 입증되면 청구하세요' 와 같은 단호한 답변을 했어야 한다. 그들이 나와 말장난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알았으면, '아 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까 전화드렸던 사람인데요~ 문의드릴 것이 있어서요' 와 같은 유들유들한 톤앤매너가 아니라 '네, 아까 말씀주신 부분들 검토하고 다시 전화드립니다.' 와 같이 조금 더 강단있는 톤앤매너로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


나를 비롯하여 분쟁이 싫어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 싫어서 내 속이 상함에도 좋은 톤앤매너를 유지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건 착한 것이 아니고, 내 이득 못 챙기고 사는 거에요. 그렇게 넘어간다고 마음이 편하십니까? 아니잖아요. 말하고 싶은 것들 마음 속으로 다 정리해두었는데 말 못하고, 몇 일 밤잠 설치면서 후회할거잖아요. 내가 말해야겠는 것들은 말하고 살아요 우리. 혹시 그 순간에 겁이 난다면, 걱정이 앞선다면 잠시 화장실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고 어떻게든 해야하는 말들은 합시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고 넘어간다해서 상대는 내 이해심을 알아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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