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 #후기 #군문제
최근 D.P가 굉장히 대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일병 사건’, ‘임병장 사건’과 같은 실화를 모티브로 한데다 배우들의 짱짱한 연기력 덕분에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군문제에 대해 무심하던 미필들과 여성들까지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것을 보며 D.P의 엄청난 파급력을 실감한다.
드라마를 볼 때는 ‘와, 어떻게 저렇게 생생하게 재현했지. 연기력 개쩌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드라마를 본지 2주가 지난 지금 계속해서 드라마의 장면들이 떠오르고, 마음 한 쪽이 찝찝하다. 굳이 따지자면, 군생활은 내게 좋은 추억 중 하나였기에 D.P를 보고 PTSD가 온다는 군필자들의 이야기를 웃어 넘겼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계속 불편한 기분이 든다.
내가 추억하던 군생활은 대략 이렇다.
[훈련소 생활]
개인의 자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곳. 내 생각과 의견은 존재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을 할 틈이 없이 빡세게 굴린다. 항상 부족한 잠과 허기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럼에도 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동기들과의 전우애, 맡은 역할 때문에 악랄할 수 밖에 없지만 본성은 착한 조교들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다. 나름 그 안에서 재미와 행복을 찾아서 지냈기에 젊은 날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자대 생활]
음.. 난 눈치가 꽤 빠르고, 적응이 빠르며, 빠릿빠릿한 편이다. 어떻게 해야 예쁨 받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던지라 이등병 때부터 선임들이 잘 봐줬던 것 같다. 이등병/일병 때는 커버해주는 선임들 덕분에 크게 혼나는 일 없이 지냈다. 친하기 지내던 선임들이 많았고, 그들이 전역하기 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상병/병장 때는 나름 실세에 속해, 다른 선임들이 우리 분대원들을 건드리지 않게 지켜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분대원들은 대부분 행정반/지휘통제실 소속이라 선임들이 자신의 편의를 봐달라고 압박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생활관 친구들과도 합이 잘 맞아 같이 운동도 하고, 노래방도 다니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군생활은 젊은 시절의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난 D.P를 보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가?
전입 첫 날.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행정반에 앉아있는데, 검은 나시를 입은 덩치 큰 남자가 오더니 내게 물었다.
(정확히 D.P의 황장수와 같은 스타일이었다)
“아그야, 너 내가 누군지 아냐?”
“죄송합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이~ 잘 봐바. 나 누군지 모르겄어?”
“죄송합니다!”
“애들아! 일로 와바라! 야가 나 잘 모른단다. 씨발 이게 맞냐?"
"어떻게 이상X 병장님을 모를 수가 있습니까? 야 니 군생활 꼬있다”
처음 자대에 온 내가 니가 누군지 알 턱이 있나..그들에게는 장난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끌려온 내게는 그 상황이 무서웠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몸이 움찔거렸다.
이등병, 아직 경계근무 수칙을 외우기도 벅차던 때였다.
잠을 자고 있는데 욕짓거리를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마 씨발 니 장애있나? 이거 장애인 새끼가 들어왔노.”
“죄송합니다.”
"니 그거 누가 가르치던데. 니 장애인 자식이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니 선임들 다 좃잡고 끌고온나 씨발놈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 닌 군생활 꼬있다 씨발놈아. 닌 앞으로 폐급이다 알았나?”
옆에 있는 동기가 장X 상병한테 혼나고 있었다. 30분 가까이 욕짓거리는 이어졌다.
생활관 동기들 모두 깼지만 겁에 질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들어본 상황은 대략 이랬다.
전입 온 지 얼마 안된 동기가 야간 탄약고 근무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랜턴이 구비가 안되어서 맞선임이 랜턴을 빌려주었다. (야간 탄약고 근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앞 길을 비추기 위해서 랜턴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다음 근무자인 장X 선임이 랜턴을 빌려달라고 했고, 동기는 본인의 랜턴이 아니기도 하고 누가 더 윗선임인지 파악이 안된 상태라 XX상병님한테 빌린 랜턴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동기가 유듀리가 없긴 했지만, 남한테 빌린 물건을 내 맘대로 빌려줄 수 없기도 하고, 누가 더 선임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 말 없이 랜턴을 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게 부모 욕을 들을 정도의 일이었던가?
그 일로 동기는 부대 전체에 폐급이라고 소문이 났고, 선임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를 당했다.
일병 말 쯤이었나,
축구를 하고 와서 씻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장X 병장이 내 허벅지에 오줌을 싸고 있고, 주변 선임들이 깔깔거리고 웃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그 것을 그저 장난이라고 받아들였다. 돌아보니 정말 미개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 당시의 나는 그걸 부조리라고 느끼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전역할 때의 그들의 태도는 황장수와 똑.같.았.다.
보통 전역하기 전 날 전역자는 생활관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곤 하는데,
그들은 전역 전날 밤에 본인들이 괴롭혔던 후임들의 생활관을 찾았다.
"마, 덕분에 즐거웠다. 섭섭한거 있으면 다 털고, 잊으라. 다 추억 아니가"
오랜 시간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던 행동들이 그들에게는 장난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은 사회로 돌아감과 동시에 정상인이 된다.
어쩌다 악질이었던 선임과 연락이 닿을 일이 있었는데, 순하디 순한 말투를 보면서 토악질이 나올 뻔 했다.
그러면 나는 달랐던가?
나는 달랐다고 생각하지만, 내 밑에 있었던 친구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당하는 사람이 괴롭힘이라고 느끼면 그건 괴롭힘이니까.
전역 후에 만났던 후임들과의 모임에서 후임들이 괴리감에 많이 놀라했던 것이 기억난다.
"와 형, 형은 진짜 괴리감 엄청 크다. 그 때는 형 엄청 무섭다고 생각했는데..이렇게 순한 사람인지 몰랐어."
확실히 후임들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이 내가 무서운 선임이었다고 기억을 한다면, 분명 위화감이 들게 행동을 했었겠지. 내가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에 밟힌 후임들도 분명 있었겠지..
D.P를 보고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은,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한 PTSD와 동시에 나 또한 똑같은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 때는 이런 얘기들이 부적응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빠릿하고, 일머리 좋은 애들은 저런 일 겪지 않는다고.. 실제 부대서도 눈에 띄게 다르게 행동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기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전역하고 사회로 나오니 다 똑같다. 부적응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잘 살고 있고,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
분명, 군 내에는 군기가 필요하다. 사람 목숨이 달려있는 무기를 다루는 곳이기에 철저한 군기와 상하복종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군기와 부조리는 정말 한끗차이. 군기에 감정이 실리는 순간 그 것은 부조리로 이어진다. 타의로 끌려가 폐쇄된 시스템 안에 갇힌 사람들은 그 안에서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군기에 감정이 실린다. 멀쩡하던 사람들도 군대에만 들어가면 병신이 되어간다.
솔직히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집단 지성의 힘을 믿는다. 군대의 폐쇄성을 연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포문을 D.P가 잘 열어준 것 같다. 은폐되고 외면 받던 군대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군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 군 내에서 폐쇄적인 시각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보다, 열어놓고 민간인들의 시각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다보면 차차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