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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만 좋으면 무슨 소용이니, 지휘자가 없는데

무미건조함만 남겠지

by 유진
프로 연주에서 종종 느끼는 감동 중 하나는 ‘일치감’이다. 소리들이 얼마나 단단하게 모여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흐름이 지휘에 따라 자연스럽게 강약을 조절하는지를 보는 것이 음악 감상의 묘미 중 하나다. 그런데 그날은 앳된 얼굴의 아이들이 그 감동을 만들어냈다.

‘큰 소리’란 단순한 음량이 아니라, 개성 있고 확신에 찬 활의 소리다.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 서두에서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그 도입부에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믿음을 실어냈고, 나는 그 순간 이 연주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나치게 유명한 곡일수록 시작이 어떻게 나올지 늘 궁금해지기 마련인데, 그날의 첫 활 긋는 소리는 내가 들었던 수많은 음원보다 더 쨍하고, 날카롭고, 선명했다. 지휘 스타일은 기교를 앞세우지 않고, 작곡가의 본질에 집중하는 담백함이 있었다. 어느 순간엔 잠시 머물고, 어떤 대목에서는 충실하게 몰아붙인다.

양성원 첼리스트가 손가락을 앞뒤로 움직이며 ‘꽃을 피워보라’는 듯 제스처를 주면, 아이들은 실제로 그 손끝을 따라 꽃을 피웠다. 예전에 내가 슈만의 협주곡에서 느꼈던 아쉬움, 피어나지 못했던 그 꽃잎이 이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걸 직감했다.

2025년 6월 13일



신기했다.


좋은 공연장에, 보장된 실력을 갖춘 연주가들이 무대에 정말 가득했다. 조금만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분 대단하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레퍼토리도 듣기 좋은 정통 곡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공연은 그 어떤 공연보다 밋밋했다. 정말, 그냥 그랬다.


이상했다.


왜 이렇게 낙차가 없지? 파도는 어디로 갔나. 분명 예전 다른 공연에서 들었을 땐 첫 시작이 시렵고 차가웠던 것 같은데, 왜 여긴 없지? 왜 이렇게 그냥— 그냥— '연주 하기'만 할까.


소리의 퀄리티는 어땠나?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다.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비올라면 비올라, 첼로면 첼로. 뭐 하나 A급이 아닌 게 없었다. 그런데 감흥이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다시 무대를 살폈다. 언론에서 ‘날고 기는 연주자’라 칭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은 줄곧 악보 위에 머물러 있었다.


가끔 첼리스트들이 합을 맞추기 위해 바이올린 파트를 바라보긴 했지만, 대부분은 보면대를 응시했다. 평소 이력 같은 건 신경 써본 적이 없는데, 들리는 표현과 그들의 이름표가 너무 달라서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 핸드폰을 보고 싶었다. 공연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음원보다도 훨씬 일정한 톤으로, 포인트를 살리지 않고, 제 갈 길만 모범적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공연장에 오는가. 그 음원이 실제로는 어떤 얼굴인지, 공연장 벽에 부딪히면 어떤 형태로 변하는지, 내 앞의 사람의 손을 타면 어떤 빛깔을 띠는지 마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특정 작곡가의 음원을 재생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의도한 것이 작곡가의 원작을 기본기에 맞춰 충실히 그려내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감정까지 학습하지 못한 인공지능이 연주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알던 음악이 아니었다. 어깨를 부르르 떨게 만들 만큼 소름 돋는 시작일 줄 알았는데, 왜 저렇게 따뜻하고 일정한 일렬로 쏟아내리지? 왜 0으로 사그라들었다가 10000으로 갑자기 솟구치지 않지?


나라면 이 시작점에 조금 강세를 주고, 중간은 여리게, 마지막엔 처음의 기운을 깃들게 해 마음을 휘어잡았을 것이다. 왜 이렇게 울렁이지 않는 걸까. 감정을 더 깊게 다뤄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그냥 ‘연주’만 하는 걸까.


머무는 순간도 없고, 몰아붙이는 기운도 없었다. 이건 그들에게 그저 연주해야 하는 하루였던 것 같다.


공연을 자주 보다 보면, 무대 위에 무엇이 그려져 있느냐, 어떤 장소냐에 따라 내가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 풍경이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몰입감이 큰 공연이면 상상이고 나발이고 그 소리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기거나, 그들이 그려내는 파도 앞에서 눈물방울만 뚝뚝 흘리며 털썩 주저앉게 된다.


때로는 연주자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할 때도 있다. 활을 저렇게도 다루는구나, 저 사람은 상반신을 많이 돌리네, 저분은 앞으로 숙이기도 하고, 바이올린을 청중 쪽으로 건네는 사람도 있구나. 저만큼 소리가 살아있구나. 생동감이 있다.


연주가 귀에 익지 않아도, 그런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장면이 흥미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 가본 공간이면, 이곳은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잔향은 어떻게 사라질까, 그들은 어떤 시선을 교환하며 앞으로 나아갈까. 곡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아도 스스로 재미를 찾아가는 버릇을 들였다. 그래야 내 시간이 아깝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날은 감정도, 소리의 변화무쌍한 재미도, 작곡가의 매력도 뚜렷하게 느낄 수 없었다. 연주자들이 서로 미소를 교환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 입꼬리에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나보고 뭘 보라고 하는 건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었다.


그 속에 있으면 모를까, 몇 미터 떨어진 내 자리에서는 그 지나치게 소리만 완벽한 그 미묘한 화합이 그리 멋지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만의 생각일까.


공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관중석을 한 번씩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무대가 어떠냐에 따라 관객들의 상반신 자세는 정말 다르다. 연주를 통해 대단한 일이 벌어지면 관객들은 고개를 곧게 들고,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연주자가 적당히 아름다운 선율을 그어내는 정도라면? 그때 관객석 한 열의 한 명은 반드시 고개를 까딱이고, 눈을 깜빡이며 애써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졸면 괜히 교양이 없어 보일까 걱정하게 만드는 게, 우리의 클래식이 아닌가.


공연을 많이 다니면서 알았다. 좋은 연주, 관객을 위해 신경 쓴 티가 나는 연주는 다 안다. 클래식을 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와, 뭔가 다르다. 이런 거야?” 하며 로비까지 흥분된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런데 그냥 적당히, 더 할 수 있으면서도 그 정도로만 하면, 사람들은 “역시 클래식은 어려운가 봐.” 하고 착각한다. 이 장르엔 그런 장벽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두 번째 곡 내내 하다가 문득, 비어 있는 한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반으로 나뉜 바움쿠헨 모양으로 단원들이 서 있었고, 그 가운데 가장 둥근 곳에 이 순간 가장 필요한 한 사람이 없었다. 아, 나는 깨달았다. 지휘자가 없구나.


지휘자가 없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그 순간부터 오늘의 무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정말 소리가 짱짱하고, 채도도 높고, 분명했지만 흥미롭지 않았다. 한 번도 밖에서 놀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분명 지휘자가 있었다면 저 부분에 강세를 두었을 것이다. 조금 더 사그라들었다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긴 바람을 밀도 있게 그려보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크게 노래할 구간이야. 첼로는 바닥 쪽에 붙어서 길을 깔아줘.”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가는 건, 사실 단원들만이 아니라 지휘자의 역량을 보러 가는 것이구나. 그들의 ‘해석 발표회’구나.


무대 위에서 연주를 잘한다는 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도 입 아플 정도로 ‘기본'적인 일이다. 소리를 잘 낸다는 것만으로는 관객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라 생각하면 좀 곤란하다. 이미 갖춰진 밑바탕 위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거나, 색다른 표현을 보여주거나, 우리를 거대하게 휘어잡거나, 다시 겪지 못할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거나, 보다 진심을 다해야 주어야 한다. 성의, 성의, 성의...


고풍스러운 음악가의 자태가 아니라, 살아 숨 쉬며 눈이 반짝이는 연주자의 오늘을 보고 싶다.


좋은 악기인 것은 알겠다. 하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을 때, 내 시간이 낭비된 사실이 매우 서글퍼진다. 정말 기대 많이 했는데,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인 걸 아는데, 딱 거기까지만 하니까 솔직히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축제라면서 왜 이렇게 적당히 하실까. 오늘은...


내가 무대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뒤틀리는 순간이 언제인가. 전혀 감동적이지 않은데, 무대 위에서 감격적인 표정을 짓고 있을 때다. 소리와 표정의 간극에서 내 인내심이 미묘하게 삐걱거린다.


더 당황스러운 순간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졸던 관객석이 무대가 끝나자마자 함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는 장면이다. 물론 그리 길진 않지만.


무척 기대했던 공연이었다.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적당히 할 일을 하고 물러났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좋은 공연장에서 좋은 연주자들이 좋은 무대를 보여줬다. 끝. 이거면 되었지 뭐.


나도 배운 게 있다. 지휘자의 역량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큰 기대를 안고 있었던 내 잘못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게 ‘평이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추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저 빗줄기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냥 마음 안에서 혼자 ‘관종’이 되어 잠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랬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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