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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모스 Dec 16. 2019

부부싸움의 목격자, 애들

영화 <벌새>를 보고


"그 집 엄마가 화가 나서 휘두른 스탠드에 그 집 아빠가 맞아서 피가 났거든. 그 모습을 그 집 딸이 지켜보는데, 아마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을 거야. 근데 그다음 날 아빠랑 엄마가 나란히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는 거야. 피났던 팔에 붕대를 감고선 다정하게. 그 집 딸은 그걸 보고 더 충격을 받은 눈치더라고."


<벌새>를 보고 와서 엄마에게 영화의 한 장면을 설명했다. 엄마는 민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고성이 오가는 부부싸움이 다음 날 자연스레 없던 일이 된다는 지점에서, 그걸 지켜보는 자녀가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하는 지점에서 그건 우리의 얘기였으니까. 좋은 영화가 늘 그렇듯, <벌새>는 잊었던 마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으며 크기 때문에 덮어뒀던 상처는 사실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에 돌봐야 했던 상처가 아닐까.


김보라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감상의 일환으로 저마다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모습이 신기하고 고마웠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경험을 말하게 된다는 건 <벌새>의 은희가 겪는 일이 우리의 유년시절과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나서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몇 있었다. 영화 <벌새>를 마주칠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걸 보면 유년시절의 내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확실하다. 덮어두지 말고 돌보라고. 그래서 영화를 본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적는다.


나는 친구와 운동장에 앉아있었다. 친구에게 토로해야 할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할 것 같다는 게 고민의 요지였다. 지금은 잘 기억도 안 나지만, 그 시절 엄마 아빠는 정말 살벌하게 싸웠다. 나는 이번 싸움은 어째서 더 심각하며, 엄마와 아빠는 왜 결코 화해할 수 없는지, 우리 가족은 앞날은 어떻게 어두운지를 친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친구는 침착하게 내 얘기를 듣고는 '절대 이혼은 안 하실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며칠 뒤면 화해하실 거라고. 나는 이번이야말로 우리 가족의 위기라고 생각했으므로 친구가 남의 집 일에 그렇게까지 확신을 가지는 게 의아했다. 진짜 이혼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엄마 아빠는 그 친구 말대로 정말로 며칠 뒤 화해를 했고, 나는 이렇게까지 서로 싫어하고 상처 줘가면서도 꾸역꾸역 같이 살아가는 게 가족인가 보다 하는 단념을 하며 그 시기에 적응해갔다. 더 심각한 싸움이 생겨도 고민으로 여기지 않고, 위기로 생각지 않으며.


그 친구가 우리 집 일에 그렇게까지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건 아주 뻔하게도, 그건 그 친구도 이미 골백번 경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뜻밖의 동지가 되어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발발했을 때 밖에서 함께 시간을 때워주기도 하고, 서로의 자질구레한 집안 사정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부끄럽고, 그래서 주저했던 게 기억나는 걸 보면 나는 꽤 오랫동안 부모님도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격하지만 따뜻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금쪽같은 딸로 자라나는 것이 '정상'적이라 생각했고, 그 궤도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두렵던 나이였으니까.


<벌새>를 그때 봤다면 그 두려움에서 훨씬 더 빨리 벗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부부싸움으로 깬 전구를 옆에 두고서 티브이를 재밌게 보는 거짓말 같은 집, 저기도 나온다고 안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부부싸움 와중 집어던지는 바람에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 우리 집 선풍기와 발로 차는 바람에 부서진 친구네 집 책장을 떠올렸다. 친구와 그 이상한 집에 마주 앉아 싸움과 폭력, 그 깜깜한 이야기 하며 태연하게 라면을 끓여 먹곤 했던 것도 기억났다. 결혼은 서로의 붙박이장이 되는 거라는 무서운 얘기를 트램펄린에서 뛰어놀며 나누던 은희와 친구들처럼 말이다.


상처를 받으면서도 상처를 받는지 몰랐다. 감자전을 허겁지겁 먹던 은희처럼, 상처를 얼른 삼켜 넘기기에 바빴다. 그렇게 덮어두고 그 시기를 통과하고서야 인정하게 됐다. 부모님도 상처를 준다는 것, 그건 당연하게도 어떤 인간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해서 가족의 완벽하지 않은 부분까지 끌어안거나 용서할 필요도 딱히 없다는 것.


<벌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명대사가 있다. 은희의 선생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손가락은 움직여진다’고 말했던 것. 그 말이 나는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모든 상황 앞에서도 유효한 단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우리는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정상'가족의 일원이 아니어도, 완벽한 사랑을 받지 못해도, 빛이 나는 삶을 살지 못해도 다행인 것은 나의 동력은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이 갖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믿고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일과 나 사이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여전히 나는 나라는 사실에 안심할 필요도 있고.


무의식 중에 이미 그렇게 했던 것 같긴 하지만, 이제야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부모님의 싸움에 불안해할 필요 없다고. 어차피 화해하실 테니까,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니까, 어느 집에나 있는 일이니까,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내게 상처를 주는 어떤 상황에나 나는 똑같이 할 것이다. 나와 상황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 사이에 선을 긋는 작업. 자기 객관화, 상처에서 벗어나기, 내 탓이 아닌 걸 알기, 유치하지만 그런 말들이 다 같은 말 아닐까.


김보라 감독 역시 그 작업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벌새>는 자기 고백적인 영화지만, 자전적 이야기로 작품을 만든다는 건 동시에 엄청난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일이니까. 한 씬, 한 장면마다 객관화 한 상처를 층층이 쌓아둔 영화 같았다. 상처는 나누는 것만으로 치료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좋은 작품은 그 자체로 치료라는 걸 영화 <벌새>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덕분에 잊었던 상처가 떠올랐으니, 나도 그 마음 열심히 보살펴서 보내준다. 고개도 안 돌아가는 부서진 선풍기와 어렵고 아픈 마음들 다 안녕. 이제 다음 씬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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