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이라고...33일이라고....
참으로 싱거운 한 해였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제자리였다. 나이 먹는 것에 감흥이 없어진다는 말이, 나이 먹는 것을 실감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2학년 다음은 3학년이고 그다음은 졸업인 당연한 업그레이드는 이제 잘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그냥저냥 살다 보면 어이쿠 또 제자리야! 싶어 자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굴레.
연예인들이 어색하게 서서 카운트 다운하는 것도 보고 보신각 종소리도 들었는데 잠이 안 왔다. 잠에 들지 못했으니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경계가 쓱싹 사라졌다. 날밤을 새면서 몇 시간 전까진 끝이라는 감상에 취해있던 사람들이 몇 시간 후엔 또 활기찬 시작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외계인이 지금 지구에 도착한다면 꽤 놀라겠다. 여기 사람들 무슨 약에 취해있는 거야?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연말이라는 것, 연초라는 것, 설날이라는 것, 추석이라는 것, 그런 것에 방점을 찍을 줄 아는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이다. 자신과 사회의 연결고리를 잘 알고, 그래서 주기적으로 주변에 보답하고 스스로는 격려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이런 관습도 잘 챙기는 거라는 생각을, 외계인이 된 듯 바깥에서 지켜보면서 했다.
내게는 참으로 슴슴한 한 해였지만, 그래서 마지막 하루를 닫는 게 힘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 올 한 해(난 안 잤으니까 오늘은 2019년 12월 32일이다), 삶의 지표가 될만한 진실 몇 가지를 발견했다. 우선, 좋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연초부터 이게 뭔 세상 부정적인 소리야!
하지만 정말 그렇다. 아, 좋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구나. 어쩌면 앞으로도 그렇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행복이 올 것이라 믿고 버티는 데 쓰지 않을까 감히 상상했다. 내게 2019년이 그랬다. 아, 좀 행복해 볼까? 하다가도 행복의 눈치를 보면서 '아냐 아냐 됐어, 그냥 해 본 말이야'하고 눈치를 보며 자리로 돌아가는 잘 못 노는 애 같았다. 실제로 잘 못 놀긴 하는데, 암튼.
하지만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다고 느꼈다면 거짓말일까.(네) 정신승리 같긴 하지만, 그 진실이 내게 살아갈 힘을 줬다. 꾸준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은 덕분에 내게 무상으로 주어졌던 수많은 운과, 우연의 결과물을 다시 보게 됐다. 너희 정말 대단한 일들이었구나? 일단 감탄부터하고, 작별했다. 무소유로 돌아갔다는 건 아니다. 더 이상 백마 탄 행운 같은 걸 기다리지 않게 됐는 말이다. 그래 기다리더라도, 혹시나 앞으로 단 한 번도 행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대비해 뭔가 하자고 다짐했다.
나의 경우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글을 쓰고 읽는 일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평생을 바쳐해야 할 일은 다른 게 아니라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지금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는 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글을 쓰려고 앉아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 보면 세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기만 하면, 정확히 보기만 하면 불행도 불안도 자산 같아서 안심이 됐다. 읽고 쓰는 동안 내 안에 뭔가 천천히 쌓이는 느낌이었다. 항아리에 물을 조금씩 쪼르르, 쪼르르 따르는 것처럼.
문제는 행운이 아닌 건 사실 티가 잘 나지 않아서 해봤자 한숨만 나올 때가 많다는 거다. 누가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조차 잘 모르겠을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영 티 나지 않는 그 작은 일들도, 어쨌든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아는가. (모르면 어쩔 건데)
행운을 목 빼고 기다리지 않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뜬금없지만 연말 시상식에서도 느꼈다. 불러주는 곳이 없을 때 직접 엑셀까지 배워 비보 TV를 만들었던 송은이. 무명 시절 재봉틀이며 꽃꽂이, 그런 잔재주를 익혀가며 바쁘게 살았던 박나래.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쌓았을 내공에 경외심을 느꼈다.
2019년에는 영 행운이 따르지 않았던 모두들, 이제는 그 싱거운 기분 툭 털었으면 좋겠다. 대신 티 나지 않지만, 성과도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공들여했던 일을 꺼내 떠올리며 스스로를 격려하자. 참 잘했어요.
밤을 꼴딱 새 버렸더니 잠이 너무 온다. 내일은 당차게 일어나 새해를 적극적으로 맞이해야겠다. 떡국도 좀 먹고, 새해를 기념해 주변 안부도 물어가며, 그렇게 삶을 긍정해야지. 복 많이 나누는 한 해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