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씨들, 장도연, 그리고 임정희...?
* 영화 <작은 아씨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 사람들이 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는 게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너무 외로워요.
꿋꿋하던 조의 마음이 파스락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영화 <작은 아씨들>의 한 장면이다. 사실 나는 조 옆의 남자가 넘나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조가 헐렁헐렁 뛰어다녀도, 술을 한입에 꿀꺽 들이켜도 있는 그대로의 조를 사랑하며 기다려줬으니까. '아 그놈의 사랑 얘기 진짜 지긋지긋한데 그래서 저는 조가 로리랑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싶은 마음이었는데, 조는 끝내 그러지 않았다. 조는 여자의 인생의 종착지가 결혼이라 생각하는 당대(과연 당대뿐만일까)의 생각과 맞서던 사람이니까, 조의 선택은 일관성 면에서 백점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이어지는 고백은 의외다. 너무 외롭다니. 그것도 조는 엄청 울컥하면서 말했다.
조가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주변 사람들한테 아주 혼쭐이 났을 거다. 그러게 로리랑 결혼하라니까? 잘 생각해봐, 로리만 한 남자 없다? 나이도 들어가는데 어쩌려고 그래, 잠깐만 외롭다고? 외로우면 소개팅을 나가 봐, 소개팅은 싫다고? 방금 외롭다면서 너!
연애지상주의 사회에서 연애를 하지 않으려면 그와 한 짝으로 외롭지 않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내가 혼자서도 얼마나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연애할 정신이 나지도 않을 만큼 불행하게 살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야 한다. 그래 봤자 상대의 심금을 울릴 정도가 아니면 실패로 돌아간다. 외롭다고 말하려면 쏟아지는 연애 훈수를 견뎌야 한다. 과거에 소개팅을 마다한 전적이 있거나 하면 두 배로 혼이 난다.
만약 나처럼 조를 보고 그녀의 인생에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면, 일종의 강박 증세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바로 '골든 레이디 강박'이라는 건데, 방금 내가 만들었다. 약 10년 전에 가수 임정희는 Golden lady라는 곡을 발표했다. 지금 보니 작사, 작곡이 무려 방시혁이다. 가사는 쿨한 명령조다. 헤어지는 남자에게 '이 집도 내가 산거야, 이 차도 내가 산거야'라는 tmi를 남발하며 현관에서 당장 나가라고 명하는 내용이다. 그때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오 오 오 오 빠를 사랑해'같은 앙탈스러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 '나 이런 여자니까 꺼지라'는 독보적인 가사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후로 골든 레이디를 부를 때의 임정희 같은 강인함을 연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외롭지 않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힘들어하는 건 구차하고 추잡한 일이고, 먼 미래에는 집도 차도 내가 살 정도의 진정한 골든 레이디가 될 거라고. 하지만 어디 그러한가. 나는 언제나 외롭고, 사랑에 실패하면 엄청나게 구차해지는 편이고, 먼 미래에 집을 장만한다고 해도 내 현관에서 나가 달라고 할 만큼 공간이 잘 구획된 집을 장만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연애를 하지 않으면서도 외롭고 구차하고 빠듯한 나의 인생은.
나는 솔로 여성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바로 조 같은 사람, 연애나 결혼보다 자신의 꿈과 커리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타인의 시선에 맞서는 데 두려움이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사람일수록 좀 외로워야 본새 난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어지지 않는 꼿꼿함 같은 것을 뽐내기에 제격이니까. 그래서 내 시나리오에 따르면 조는 쭉,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했다. 하지만 조는 외로워한다. 나는 내가 조의 무너진 마음을 구멍 난 양말처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내 안의 모순을 인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연애와 결혼 담론에서 자유롭고 싶어 하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어떠해야 한다(골든 레이디여야 한다)는 납작한 이상향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연애와 결혼은 기본값이 아니다. 그러니 비 연애와 비혼에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다. 독립적이거나, 외로움을 타지 않거나, 이 집도 차도 내가 산 것일 필요가 없다. 연애와 결혼 여부와 별개로 우리는 완전하다. 완전한 사람이라면 기쁨도, 슬픔도, 외로움도 느끼기 마련이니까 조가 외로운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다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다시 또 외로울 수 있다. 조에게는 그때마다 슬퍼하고 힘들어할 자유가 있다.
나는 결국 조의 외로움을 인정하고 그에게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마땅한 외로움을 느끼는 조를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찾아오는 기적 같은 순간들, 그 사이사이를 외롭고 막막한 대부분의 시간들로 잘 꿰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나는 내가 완벽하진 않아도, 완전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 헛헛할 땐 언제나 유효한 <나 혼자 산다> 333화의 장도연의 명언을 되새기기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