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쉬는 시간이라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가언아, 담임이 너 부르는데?”
“나를? 나를 왜.”
“몰러, 빨리 좀 오래.”
졸려서 반쯤 감긴 눈으로 교무실을 찾아갔다. 담임이 날 왜 부르지?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당시 나는 반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이 날 부를 땐 보통 두 가지 이유였다. 무료 급식 신청서를 빨리 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혹은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묻기 위해서.
드르륵.
“어, 가언아. 여기 앉아라.”
담임선생님이 날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았다.
“네가 이번에 쓴 글, 교내 1등이다. 축하한다. 교장 선생님 상 받을 거야. 그런데 그게 교내 신문에 실려야 되는데.”
“교내 신문이요?”
전교생 글쓰기 대회였다. 가족을 주제로 뭘 쓸까 하다가, 가난한 어린 시절과 부모님의 이혼, 반지하 셋방살이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어차피 선생님만 보는데 뭐가 부끄럽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글이 교내 신문에 실린다면 나의 치부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셈 아닌가. 친구들에게 가난을 숨기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건 안 될 일이다. 수상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 교내 신문에는 안 실리고 싶은데요.”
담임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그럼 교장 선생님 상도 못 받을 거야. 정말 괜찮겠니?”
얼마나 해보고 싶던 전교 1등이었나. 성적도, 성격도, 외모도, 집안도 무엇 하나 잘난 것이 없는 나였다. 전교 1등은 이번 생에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가난으로 전교 1등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교장 선생님 상을 받으면 강대상에 올라갈 것이다. 전교생이 보는 교실 TV에도 나올 것이고. 살면서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였다. 앞으로도 영영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간 단호한 마음으로 담임선생님에게 말했다.
“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뭐...”
“그래 알겠다. 가보렴.”
“안녕히 계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상을 받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담임이 왜 불렀냐고 묻는 친구에게, 그냥 별말 아니던데, 라고 얼버무렸다.
며칠 뒤, 교실로 배달된 교내 신문에는 2등 상을 받은 아이의 글이 실려 있었다. 1등이 누구인지, 왜 2등의 글이 실린 건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여기에 내 글이 실릴 수도 있었는데,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똑같은 아침이었다. 늦잠을 자서 머리를 못 감고 나왔지만 조금밖에 떡지지 않았으니 하루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바로 그때,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2학년 5반 허가언은 지금 바로 교장실로 와주세요.”
순간 죄지은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담임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상을 받아야 하니 얼른 내려가 보라고 말씀하셨다. 아, 그거 방송 나오는 거 아니야? 나 머리 떡졌는데! 하, 내 앞머리!
“가언아 나 떡진 머리에 뿌리는 파우더 있는데 뿌려줄까?”
톡톡, 톡톡 톡.
앉아있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교실 문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복도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모두 조회가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텅 빈 복도에 나의 발소리만 울렸다. 타탁 탁탁. 계단을 내려갈수록 심장이 떨렸다.
‘와, 나 진짜 상 받는 거야? 대박이네!’
교장실에 도착하니 다른 수상자들이 의자에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 의자에 앉아있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에 상장을 받아들고 교실로 돌아왔다. 쉬는 시간이 되자 옆 반의 친구까지 나에게 달려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상을 받은 거냐고. 그때는 말하지 못했다. 내가 어떤 글을 썼는지, 나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말이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일을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울면서 잠든 밤을 헤아릴 수 없고, 그 밤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 혼자 쓴 책이 아니다. 별 볼 일 없고 눈에 띄지 않는 나를, 특별하고 존귀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아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특히 나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2022년 봄, 언언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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