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유진 May 12. 2021

손톱 못 깎는 여자

내가 네일숍 단골이 된 이유

"유진 씨는 네일 하는 걸 참 좋아하나 봐요. 그렇게 하면 얼마예요?"

"한 달에 네일 하는 데 얼마나 들어요?"

"네일이 또 바뀌었네요."


言中有骨(언중유골). 대개는 지나가며 하는 소소한 잡담이었지만, 가끔은 느껴졌다. 어째서 불필요한 사치를 하는가를 에둘러 말하는 상냥한 꾸지람이. 나는 늘상 웃으며 네일아트를 하고 나면 기분전환이 되노라고 답하곤 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치다 보면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슬쩍슬쩍 보이는 알록달록한 빛깔들이 잿빛 큐비클과 검정 자판으로 가득 찬 삶에 작은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도 했으니까.


그러나 내게 네일숍에 들어가는 비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는 내 손톱을 깎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른손의 손톱을 깎지 못한다. 뇌성마비로 인한 좌측 편마비 탓이다. 일반적인 편마비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몸통에서 멀어질수록 경직이 심해지기 때문에, 손톱을 깎는 것과 같이 손가락 마디마디의 세밀한 움직임과 힘 조절이 필요한 일은 실행하기가 어렵다. 


대학생 시절엔 단짝이던 하우스메이트가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나의 오른손을 단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여 직장인으로 살게 된 뒤에는 나의 손톱을 부탁할 이가 없어졌다. 주변에 나의 상황에 대해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히 이야기하기가 껄끄럽기보다도, 아버지의 전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하고 나서, 혹여라도 회사에서 몸이 아프다는 말은 말거라.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나의 탄생은 지독한 난산이었다. 겸자 분만을 하다 두개골을 건드린 탓인지, 오래 나오지 않아 질식할 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이 되기 전에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미 아이를 넷이나 키워낸 외할머니는 오른손으로만 기어 다니는 큰손녀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채셨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매우 경증이었던 병세 탓에 처음엔 여러 병원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기야는 의료진에게 노인네가 노망 난 것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듣고도 할머니는 의견을 굽히지 않으셨다. 할머니 덕에 결국 나는 확진을 받았고, 지체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기관에서 근무하던 어머니 덕에 당시 국내에 두 명 밖에 없었던 보이타 치료 전문가에게 재활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기 재활 때문이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정도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언젠가는 완치될 수 있다는 믿음 반, 나에게 찍힐 편견의 낙인이 싫은 마음 반으로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이들의 염원 탓인지 가끔 내가 몸이 불편하다는 것조차 망각한 채로 살았다.


손톱이 길어지면 나의 망각도 끝이 났다. 나의 손을 부모에게, 형제에게, 혹은 벗에게 얌전히 맡기고 있을 때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직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네일숍에 가면 그 행위에 정당성과 자주성이 생겼다. 손톱을 자를 수 없어 남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쁜 손톱 관리를 위해 전문가를 고용하는 형태로 그 모양새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업계 통칭 [기본관리]를 다니던 나에게 곧 난관이 닥쳐왔다. 바로 네일숍의 영업이었다. 방문 당 2만 원씩 내는 고객을 5만 원씩, 7만 원씩 내는 고객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이 색도 예쁘다, 저 색도 예쁘겠다 하며 나를 주시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일반 매니큐어로 네일을 칠해 보았다. 며칠간 예뻤던 손톱은 금세 벗겨지기 시작했다. 다음번 네일숍에 가서 벗겨진 네일이 너무 볼품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예상했다는 듯이 벗겨지지 않는 젤 네일을 권유받았다. 과연 젤 네일은 가성비가 좋았다. 부러지지 않도록 신경만 써 주면 늘 윤기가 반지르르한 상태로 유지되었고, 바른 후에 매니큐어가 어디에 찍힐까 싶어 멍하니 앉아 있을 필요도 없었다. 가격도 보태 보태 병을 유발하기 딱 좋도록 명민하게 책정되어 있었다. 나의 손끝에 꽃이 피어나 있다던지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즐거웠다. 공들인 아트를 마친 후에 잘 나왔다며 흡족해하는 네일 아티스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작은 작품을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울살이 5년 차, 회사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에게 나의 병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입이 무거운 친구였고, 굳이 이 일만 이야기해 주지 않는 것이 뭔가 속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친구가 달에 한 번씩 회사에 손톱깎이를 챙겨 와 아무도 모르게 소회의실에서 내 손톱을 깎아 주었다. 친구에게 동그랗고 단정하게 잘린 손톱을 보면 마음이 따뜻하고 몽글몽글해졌다. 화려한 젤 네일을 보며 느끼는 기쁨과는 다른 것이었다. 꼭 친구처럼 말쑥하고 정갈한 그 모양이 좋아서 차츰 네일숍에 발길을 하지 않게 되었다. 


보육원에 오고부터는 아이들에게 손톱을 맡기고 있다. 여기서는 이것저것 손을 쓸 일이 많기에 짧고 단정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금세 까맣게 때가 타기 때문에 평소보다 바짝 깎게 되었는데, 그것도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바짝 깎인 손톱이 여러모로 편해졌다. 아무래도 가장 편한 것은 나는 손톱을 깎아 주어야 하는 사람임을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되는 일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단언컨대 어릴 적 재활을 위해 피아노를 치던 시절부터 자라 밭일을 하던 때까지도 남들보다 적은 노력을 들이거나 몸 상태를 핑계 삼아 일을 피한 적은 없다. 무조건적인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두렵고 싫었기 때문이다.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던 나의 노력들, 또 나의 성취들에도 불구하고 불쌍한 사람, 어딘가 부족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건 아마 소위 "사회적 약자"로 통칭되는 이들, 또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아이들의 가능성에 대해 선을 긋고 바라보게 된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초월하여 아이 하나하나를 바라보려면 매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애써 미리 이런저런 가능성을 남의 입장에서 미리 걸러내주지 않도록 말이다. 사람 일을 누가 알겠는가? 법이 유리한 쪽으로 바뀌면 언젠가 태국 국민이 되어 총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손톱 깎아달라고 손을 내밀던 나를 기억할 때, 그 언니가 손톱은 못 잘랐지만 이렇고 저런 것은 참 잘하는 사람이었지. 나도 이건 못하지만 저것은 잘하니까 저것을 열심히 하면 돼.라고 한 번쯤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딱 그 정도는 훌륭한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내 손톱을 예쁘게 잘라 주었던 모든 이에게 감사를 담아 바칩니다.]














작가의 이전글 작은 것에 흔들리는 결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