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운설 Sep 20. 2022

[서평, 리뷰] 오랑캐의 역사

중화제국과 그림자 제국을 잇는 웜홀의 역사

  흔히 중국 역사를 망망대해로 비유한다. 중국을 침범한 이민족들이 셀 수 없이 많은 한족에 동화되어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 소멸된다는 얘기다. 더 이상 만주어를 쓰지 않고 한족화 된 만주족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그러나 오늘날 만주족은 1천만 명 정도로 추계되고 신장지구에는 아직도 만주어를 쓰고 그들의 풍습을 따르는 후예들이 살아간다. 블랙홀처럼 주변 오랑캐들을 잠식한다는 중화 역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김기협 교수는 [오랑캐의 역사]에 ‘만리장성 밖에서 보는 중국사’라는 부제를 달았다. 말 그대로 이해하자면 중국 인구의 절대 다수인 화하족(華夏族), 즉 한족(漢族)이 아닌 주변 민족과 새외 세력 입장에서 바라보는 중국사라는 뜻이다. 그런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부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저자가 얘기하고 싶었던 담론은 고대 하나라에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중화제국의 연속성을 찾는 것이다. 수천 년간 거대한 영토와 수십수백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체계를 유지했던 진정한 역사의 원동력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제국이란 힘의 중심에서부터 문화, 민족성이 자신과 전혀 다른 영역과 구성원에게까지 통치권을 확장하는 국가로 정의된다. 따라서 중화제국은 한족, 즉 화하족이 여러 이민족을 아울러 다스리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화 제국의 역사는 한족이 주도권을 쥔 시기가 그리 많지 않은 아이러니에 봉착한다.


  중국 왕조는 하-상-주-(춘추전국)-진-한-(삼국)-진-(남북조)-수-당-(5대10국)-송-(요,금)-원-명-청-중국 순으로 이어진다. 괄호로 표시된 시기는 천하가 분열된 시기였고 나머지 국가들이 천하를 통일한 왕조이다. 상기한 통일 왕조 중에서 춘추전국시대 이전 관점의 화하족이 세운 나라는 하, 주, 한, 진, 송, 명 정도에 불과하다. 최초의 역사 국가로 인정받는 상나라가 동이 계열이라는 논란이 있고 최초의 통일 왕조였던 진(秦) 나라가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서융의 강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중화제국의 역사를 한족만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좁은 의미의 화하족은 지금의 하남성에 세력을 두었다. 흔히 말하는 중원에 근거하였는데, 황하강과 양쯔강 사이의 하남지역을 가리킨다. 주나라 때까지 화하족의 강역은 하남 일대에 국한되었으니 중화의 관점에서 그 밖의 새외세력을 일컬어 이만융적이라 하여 하남을 둘러싼 동서남북에 있는 다른 민족들을 동이, 남만, 서융, 북적이라 불렀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중원의 황화 문명이 세력을 넓혀 장강과 파촉 문명권까지 교류하며 확장해 나가자 동이는 산동반도에서 바다 건너 북만주와 한반도로 밀려나고 남만은 점차 남쪽 해안가까지 세력을 잃은 후 서서히 화하족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서융과 북적만이 고대 이후 명, 청까지 중화제국을 위협하고 교류했던 세력으로 남는다.


  이만융적 중에 서융과 북적만이 중화제국과 중원을 두고 다툴 수 있던 이유는 사회 경제 기반이 유목에 근거했다는 점에 있다. 동이와 남만은 동일한 농경 문화권이었던 탓에 철기 문명이 발전하고 농업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화하족으로 통합되었다. 이에 반해 기후가 농업에 적당치 않은 서융과 북적은 원시 목축업에서 대규모 유목으로 생산성을 발달시켜 통합에 적당치 않았다. 유목 사회는 비록 과거에 비해 생산성이 높아졌을지라도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니 궁극적으로 농경사회에 의존하며 경쟁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약탈 대상인 농경민족에 의존하는 유목민족의 모순은 생존전략에도 영향을 미쳐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먼저 내경 전략이다. 농경민족의 세력권 안에서 터전을 잡고 그들이 필요한 군사적 기능을 대행하며 공존하는 방식이다. 한나라 이후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이민족이 세운 나라는 내경 전략을 구사했던 세력들이었다. 다음으로는 외경 전략이다. 농경민족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유목사회를 고수한다. 부족한 생산력은 농경 사회를 수탈하거나 교류하며 메꿔 나가는 방식이다. 한때 한나라, 당나라를 위협했던 흉노, 돌궐이 채택한 전략으로 통일제국을 군사력으로 위협하여 조공을 받거나 제국의 변경을 약탈하여 경제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중화제국과 유목민족 간의 관계는 제국과 그림자 제국 가설로 연결된다. 중화가 통일되어 강력한 제국이 등장하면 외경 전략을 취하는 유목민족도 농경사회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거대한 군사-정치 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조직 기술과 원리는 농경 사회로부터 본받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토머스 바필드의 내•외경 전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채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이매뉴얼 윌러스틴의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의 3중 세계체제론을 그림자 제국인 유목민족의 역할과 결부하여 중심부-외곽-배후지로 중화제국의 원리를 풀어낸다. 화하족이 차지하고 있는 동아시아 대륙의 중국 문명을 중심부로, 이 중심부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어느 정도 매여있는 서북 방면의 유목민족을 외곽으로, 외곽보다 더 척박하고 건조하여 유목에 적당치 않고 문명과 접촉이 드문 파미르 고원 일대의 미개발 지역을 배후지로 보고 유라시아의 역사를 통찰한다. 이를 아시아 대륙에 빗대어 보면 중동의 이슬람 제국과 중화 제국 사이에 각기 외곽과 배후지가 있는 것이다. 양 제국의 변경 사이에 있는 유목민족들이 문명을 연결하고 확장해주는 역할을 했다. 세계 역사상 최대 제국이었던 몽골 제국은 유목민족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정주 문명을 지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지배력을 넓히려는 열린 제국과 외경 전략을 구사함과 동시에 중국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치세를 하려는 닫힌 제국과 내경 전략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제국은 4개로 분열되어 힘을 잃어 갔다.


  그는 세계사에서 근대화를 이끈 서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한 일방적인 역사 해석에 반기를 든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서 발원한 고대 중동 문명은 그리스 문명과 함께 지중해를 아우르는 오리엔탈 문명의 중심이었고 이를 페르시아를 거쳐 이슬람 제국이 계승, 발전시켰다. 당시에는 근동이 유럽이었고 서유럽은 로마제국의 외곽에 불과했던 곳이다. 낙후된 서유럽은 중세를 거치며 이슬람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여 제한된 노동력 하에 에너지 집약적이고 자원 집약적인 문명을 일궈냈다. 인구가 풍부하고 자급자족이 충분하여 안정된 천하를 유지하려던 닫힌 중화제국과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명, 청대의 중화제국은 국가가 주도하는 교역 체계를 유지했다. 흉노로 대표되는 북로의 오랑캐를 염려하여 만리장성의 90%가 명나라 때 건축됐다. 정작 보이지 않는 위협은 남왜의 남쪽 오랑캐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 이후로 식민지로부터 획득한 자원을 바탕으로 급속하게 국민국가로 거듭나고 이를 일본이 이어받는 와중에도 여전히 중화제국은 남왜와의 통교를 제한했다. 이에 내경에 만족하지 않은 남왜 외경 세력이 명, 청 제국의 변경을 위협한 중화제국은 수당 이후로 혼돈과 분열의 시기를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게 되었다.


  이 책은 중화제국의 역사가 오롯이 한족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이만융적의 오랑캐, 이민족과 교류하고 통합하면서 제국의 질서를 유지해갔으며 이민족으로부터 다른 문명과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설파한다. 또한 오랑캐의 역사가 이슬람과 유럽으로 이어지고 다시 제국이 뒤늦게 발흥한 유럽제국과 일본이라는 남왜 문명에 무릎을 꿇게 되는 과정을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발굴된 유적으로부터 실재와 사실을 추론하는 고고학과 달리 역사학은 사료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과거에 문자로 기록된 사료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학이다. 사료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유추하는 것이 역사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이지만 그 사료를 기록한 자들의 가치관이 투영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공평무사하게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당시의 가치관으로 투영해야지 오늘날의 잣대를 들이대면 곤란하다. 해석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편견 하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이 그 예일 것이다. 도광양회를 넘어 주동작위를 함에 있어 중국이 무리수를 두는 일들이 즐비하다. 중국이 자행하는 역사 왜곡에 대해 개인적으로 분개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이 차지한 영토와 다민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북공정과 동북공정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민족 감정이 앞선 탓이다.


  ‘북미 텍사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아즈텍 문명의 한 축이자 영역이었으니 멕시코가 자기네 것이라고 한다면 흔쾌히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현재 텍사스는 미국 영토이니 미국의 역사라 순순히 끄덕일 수 있나? 텍사스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사안이다. 텍사스 인디오의 후예가 멕시코인이고 그 강토를 오늘의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할양받은 것이 사실이나 그로 인해 텍사스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될 일이다.


  비슷한 질문으로 ‘고구려의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되물어 본다. 고구려는 분명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다. 그러나 오롯이 한반도에 있는 우리 한민족만의 역사도 아니다. 만주에 남아있는 조선족이 있는 한 말이다. 발원지에서 세력을 잃은 민족의 비극이자 아이러니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외경 전략을 채택했다. 그리고 멸망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존의 식민사관에서 탈피하여 현존하는 사료로써 한민족 고대사를 재조명해야만 고대사의 가려진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고대의 평양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인지. 중화제국이 기록한 사료에 정답을 찾을 단서들이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리뷰] 성장의 길, 북인도 히말라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