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제베를 타고 코트다쥐르
망똥(망통, Menton)을 다녀왔다. 늦은 바캉스라 해도 좋다.
지난 6월 한국을 다녀온 뒤 어깨 결림과 손목에 미세한 통증이 지속되고 있다.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아니면 운동부족? 나이 탓? 오십견? 어쨌든간?
의사의 진단을 받기 전에 먼저 온화한 지중해 바닷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수영을 하면서 일광욕으로 해변가에 드러누워 적당히 따가운 햇볕을 쬐이며 무념무상에 들고 싶었다. 통증이 가시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떠났고, 8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깨 결림은 좀 나아진 듯도 아닌 듯도, 그러나 피곤함과 함께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팔과 어깨에 가려움증을 동반한 빨간 반점이 생겨나더니 지금은 목과 얼굴까지 번져 마치 뭉겨놓은 딸기 같다. 가려움증을 완화시키는 연고를 발라도 그다지 효과가 없다. 결국 의사의 진단을 받기로 했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벼룩이나 빈대 같은 것에 물리지 않았을까 지극이 합리적 의심도 해본다. 왜냐면 우리가 머물었던 친구의 망통 집은 사람이 꾸준히 살지 않아 침구를 비롯해 소파 등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대신 기거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급작스런 증상이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의심되는 부분이 전혀 없지도 않다. 하루는 3층에 올라갔을 때 폐쇄된 공간에서나 맡을법한 먼지와 함께 뒤섞인 다락방 같은 냄새가 났다. 그동안 닫혀있어서라고 가볍게 여기고서는 소파에 드러누워 읽던 소설을 이어갔다. 이후 한두 번 가렵다는 생각은 했으나 그마저 모기 탓으로 돌렸다. 지금 와서 생각건대, 이 증상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세 번째 가는 망통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앞서 자동차로 갔던 두 번과는 달리 테제베를 탔다. 프랑스에 사는 동안 테제베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는 처음이다. 여태컷 자동차로 움직이는 게 편하고 유용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자동차보다 한정된 여행이기는 하나 분명 자동차로 보지 못한 것도 볼 수 있어 새로운 매력이었다.
파리 리용역을 출발한 테제베(TGV, 고속열차)는 남쪽으로 사선을 그으며 중동부의 부르고뉴 지방을 가로지른다. 곧 프로방스를 지나면서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을 따라 니스역에 도착한다. 쉼 없이 달리는 가운데 정차한 몇몇 역을 포함하여 총 6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니스에서 내려 다시 엑스프레스 로컬(지역) 열차를 갈아타고 30분간 더 달리면 망통이다.
프랑스의 중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 지방은 나지막한 구롱지대로 풍요로운 목초지다. 소와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언덕 위 잘 정돈된 목장마다 기와를 올린 멋스러운 농가들이 평화롭고도 한적하다. 종탑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고장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이 지역을 지날 때마다 참 차분하며 고요하고 요요히 아름답다 느낀다. 그리고 왜 프랑스 소고기, 양고기가 과하게 비싸지도 않으면서 맛이 좋은지 새삼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종류의 프로마쥬(fromage, 치즈)와 우유도 마찬가지...
어느덧 테제베는 남쪽지방을 지나고 있다. 창밖은 여전히 아궁이 속 같은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고, 그럼에도 확연히 다른 자연의 모습. 우리는 나무와 식물에서부터 남쪽 냄새를 읽는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빛의 고장 프로방스마저도 오늘만큼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해 봤던 쓸쓸한 모습이다.
시속 300 킬로미터를 달린다는 테제베의 안내방송과 함께 발랑스를 지나자 갑자기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다. 그제사 창에 드러나는 빗물의 흔적이 수직으로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수없이 많은 수컷의 생식세포가 마라톤을 하듯 우리와는 반대방향을 향해 수평으로 달아난다. 사실 비는 벌써전부터 오고 있었다. 단지 테제베의 속력 때문에 창문으로 흘러내리지 않아 우리가 인지를 못했던 것이다. 얼마나 빠르게 달리면 비조차 피해 갈 수 있었을까? 이 엄청난 속력에 놀랍고도 신기할 뿐이다.
그리고 테제베는 프랑스 남단으로, 한때는 세계적인 항구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북아프리카 이민자들과 범죄도시라는 오명으로 전략해 버린 마르세이유까지 약 700km 거리를 3시간 만에 도착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오후 느지막이 출발해도 같은 날 망통에 도착할 수 있다. 옆 고속도로를 달리던 자동차들도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또한 시속 100km를 족히 달렸을 텐데...
그러나 테제베도 마르세이유에서 니스까지는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
이 노선은 평지의 내륙과 달리 곡선으로 해안을 따라 수많은 곶과 만을 이루는 바위산이다. 그래서 터널도 많다. 아무리 테제베라도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러나 속도보다 더 값진 아름답게 빼어난 지중해 코트라쥐르의 풍광이 우리를 반기며 기다린다. 아름답기로 프랑스 땅에서도 으뜸가는, 자연이 선사한, 풍부한 햇살과 연중 온화한 날씨의 보석 같은 곳이다. 코트라쥐르(Côte d'Azur), 이름 그대로 푸른 아쥐르 빛의 만!
사실 갈 때는 아쉽게도 이미 날이 어두워져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어느 하나 놓칠세라 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새기어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테제베가 운 좋게도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를 지났다. 우리는 세잔의 그 유명한 그림 생-빅토와르(Sainte-Victoire) 산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테제베가 움직이는 방향 따라 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도 했으나 세잔이 그렸던 그 정확한 각도를 나타내지 못해 조금은 아쉬웠다.
프로방스(provence), 파리에서 출발하면 중동부의 초원 같은 부르고뉴지방을 지나 로마제국시대 갈리아의 고대 수도였던 리옹을 거쳐 발랑스, 그리고 더 남쪽으로 오랑주, 아비뇽에 이르면 우리는 비로소 공기가 다름을 느낀다. 프로방스 냄새다.
가볍게 훨훨 날듯 반듯하고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건물의 덧창문, 주홍빛 반원통형 로만식 기와를 올린 편편한 지붕, 쭉쭉 뻗어있는 시프레 나무와 이름 그대로 파라솔을 펼쳐놓은 듯한 파라솔 소나무, 올리브나무, 포도나무들이 프로방스임을 나타낸다. 태양의 열기를 느끼게 하는 붉은 땅. 북쪽의 짙푸른 나무와 습한 숲들과는 확실히 다른 색깔을 띤다. 이 훈훈한 공기를 맡으면서 우리는 마침내 집을 떠나왔음을 느낀다. 바캉스, 여행, 휴식이라는 단어들을 되새기면서 긴장이 풀어진다.
테제베는 마르세이유부터 또는 마르세이유까지 해변가를 달린다. 코트다쥐르(Côte d'Azur)다. 프랑스에서 연중 가장 햇살이 많다는 도시 툴롱과 분홍 포도주로 잘 알려진 방돔, 영화제로 유명한 아름다운 도시 칸느, 관광객들 발길을 끌어당기는, 피카소가 작업실로 사용했던 작은 성, 지금의 <피카소 미술관>이 있으며, 요트 정박으로 최상의 항구를 갖춘 앙티브, 또 코트다쥐르의 수도이면서 프랑스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마티스가 빛을 찾아 예술에 전념했던 고장, <마티스 미술관>과 <샤갈 미술관>이 있고, 오페라, 연극, 그리고 해변가 영국인들 산책길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니스에 내려 망통행 로컬 엑스프레스를 갈아탄다.
푸른 아쥐르 빛깔로 넘실대는, 빛에 반사된 은빛물결, 그저 기분 좋게 만드는 바다, 바다, 이 살갑게 감도는 공기, 날씬한 야자수와 고목이 된 선인장들, 레몬, 오렌지, 월계수 꽃들이 더불어서 코트다쥐르의 풍경을 그려 놓았다. 온갖 꽃들이 기쁨으로 안긴다. 9월임에도 한창 여름, 연중 절반이 여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 즐비한 크고 작은 해수욕장, 바캉스 그리고 여유, 자유, 젊음, 삶이 박장대소를 하는 곳. 그래서 나도, 당신도, 프랑스인들, 누구든지, 좋아하는, 좋아지게 하는, 좋아하게 되는 곳이다.
흥미롭게도 이 길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다는 바티칸 다음 두 번째로 작은 나라 그러나 부유한 모나코가 있다. 니스를 지나 망통으로 가는 길목 해안에 프랑스 땅으로 둘러싸인 마치 그 일부인양 하지만 색다른 모습의 빌딩도시. 열차가 통과하는 터널 중간 즈음에 자연광이 살짝 비치면서 정차를 한다. 모나코 역이다. 역과 선로가 모두 동굴 속에 들어가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바위산을 뚫어 만든 아주 긴 터널, 도시를 완전히 보호하면서 적은 면적을 최대한도 활용한 결과다. 역시 부자나라답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좁고 물가가 비싼 나라에 열차이용객들이 쾌나 많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여행객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근방 프랑스나 이탈리아 벤티밀리아 등지에 거주지를 두고 모나코로 출퇴근을 하는 일용직이나 서비스업 종사자들이었다. 이 또한 자동차로 지나다닐 때는 몰랐던 사실이다.
비좁은 면적 탓으로 높이 쌓아 올린 빌딩들, 아슬하게 지은 비탈진 언덕의 고급 빌라들. 무엇보다 바다를 향해 탁 트인, 가파르고 양지바른 언덕 위 공동묘지의 모습은 부자 나라답게 그 마저 극적으로 보였다. 죽은 자들도 아름다운 곳에 잠든 모습이랄까?
해안가를 따라 달리다가 근해에 유독 고급 요트와 오밀조밀한 빌딩 숲이 보이면 멀리서도 모나코임을 금방 알아챈다.
테제베는 니스 가까이에서 혼선을 일으켜 느림보 행세를 한다. 무릇 지하철을 타고 있다는 착각까지 든다. 열차가 지체하는 만큼 마음도 조급하다. 망통행 열차를 탈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예상치 못한 연착이다. 기상 탓인 것 같다.
우리는 30분 늦게 니스역에 도착했다. 용케 마지막 열차가 남아 있었다. 22시 20분 예약 망통행은 떠났고, 밤 10시 55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탔다. 탑승은 예약시간 열차표와는 무방하게 자유로웠다.
지중해 연안의 밤은 낮 못지않게 뜨겁고 관능적이다. 밤 11시임에도 9월의 살가운 밤기온, 여름옷차림, 가방을 든 여행객들, 바다냄새, 한낮의 열기가 공기 속에 떠돈다. 최대한 멋을 낸 청년의 여성들, 길게 풀어헤친 머리가 좌우 왔다 갔다 파도를 치면 코트다쥐르의 정열적 훈훈한 향기가 풍겨온다. 건강한 갈색빛 피부에서 지중해 태양의 숨결이 느껴진다. 명랑하고 깔깔한 웃음소리에 금요일 밤이 요란하다.
자정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망통역에 내렸다.
친구의 집은 망통역에서 걸어 20분가량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170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가장 힘든 과정이 남았다. 이 늦은 밤에 덜덜거리며 캐리어를 바닥에서 끌 수도 없다. 밤중의 소음은 더 크게 들리는 법. 민폐다. 남편은 캐리어를 들고 올랐고, 난 이미 예견하여 작은 배낭을 메고 왔다. 그럼에도 턱까지 헉헉 차오르는 숨을 달래기 위해 난간을 붙잡고 세 번씩이나 멈춰 서야만 했다.
우리는 자정이 되어서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엉거주춤 가방을 풀고서, 대충 씻고, 새 침대보를 까는 둥 마는 둥 잠에 곯아떨어졌다.
밤새 천둥번개 소리에 잠이 잠깐 깬 것도 같았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