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팔레르모-시라쿠사-노토-아그리젠토 다시 팔레르모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누군가는 영화에서 보았던 한 장면처럼 1, 2차 세계대전 전, 후의 빛바랜 황금색 및 흑백의 목가적인 풍경과 소박한 시골의 정겨움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지중해의 더없이 아름다운 해변과 낭만을 떠 올릴 것이다. 또 누군가는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의 건물에서 호쾌한 기분을 가질 것이며 또는 몽환경에 빠져들기도 할 것이다. 혹자는 격렬한 화산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 곁에서 굳건히 살아가는 기이한 삶과 그에 대한 의문도 생길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그 모든 것에 덧붙여 나폴리와 함께 야만적이고 폐쇄적인 마피아의 도시로도 상상되어 왔다. 그럼에도 "시칠리아"는 그 발음의 음률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을 경쾌하게 담아낸 서정적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서 좋았다. 그래서 애틋한 정을 느꼈다.
이처럼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아름답고 다채로운 문화를 가진 곳이기에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와 매력을 주는 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 따라 세상 모습 또한 바뀌듯이 영화 속 한 장면보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번잡한 거리와 사진 찍기에 바쁜 그들의 모습에서 시칠리아가 갖는 명성과 영광을 더 잘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유적지가 잘 보존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볼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여행의 비수기 3월임에도 공항에는 많은 내국인들 발걸음으로 앉을 좌석이 없을 정도다. 하물며 5월 6월의 성수기를 생각하니 그냥 머릿속이 아찔했다.
시칠리아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불분명하지만 다산의 섬을 뜻하는 그리스어 'sik'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섬이 삼각형 모양을 나타낸다 하여 고대 그리스에서 트리나크리아(Trinacria)라는 별칭으로도 불리어졌단다.
때로는 위대한 문명의 중심지였고, 때론 카르타고, 그리스, 로마, 반달족, 동고트족, 비잔틴, 아랍, 아라곤 등 지중해의 여러 주요 강대국에 의해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단순히 식민지로써 이민과 이주민의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시대를 거쳐 토착민들의 오랜 독립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특히 시칠리아 노르만 오트빌 가문 출신인 로저 2세가 1130년에 세운 시칠리아 왕국은 오늘날까지도 그 영광의 유산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만큼 시칠리아는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지와 아랍-비잔틴-노르만 시대의 건축물들이 혼재되어 지금도 도시를 황금빛으로 반짝이게 한다.
시칠리아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더불어 고대부터 유럽을 비롯한 아프리카와 동양을 잇는 무역의 교차로에 위치한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해 왔다. 특히 노르만족 시대에는 화려한 번영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강력하여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 예로 시라쿠사와 팔레르모는 각각 헬레니즘과 중세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묘사되었다. 나는 도시의 현 모습에서 비록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코 그 아름다움의 본질은 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묶어 두었던 시칠리아를 11박 12일간 여정을 시작했다. 여름 바캉스가 아닌 관계로 일정을 길게 잡지는 않았다. 아무리 유럽 남쪽이라도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에는 아직 물이 너무 차다. 따라서 바닷가 작은 도시나 시골의 한적함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큰 도시의 박물관과 유적지 위주로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로 잘 알려진 수도 팔레르모, 시라쿠사, 노토, 아그리젠토를 택했다. 항공권을 구입한 후에 조금 성급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착과 출발이 팔레르모 공항이라 하루를 고스란히 길 위에서 소모하게 된 것이다. 싼 항공권을 놓치지 않으려 서둘다 시칠리아 동쪽에 있는 제2의 도시 카타니아에 공항이 있다는 사실을 놓쳤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다시 팔레르모로 돌아와 미처 앞서 맛보지 못했던 수도원에서 만든 시칠리아의 상징 같은 케이크를 먹을 수 있었다는 점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트뤼프 버섯이 든 라비올리 요리와 싸고 맛 좋은 포도주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맛 좋은 음식을 같은 값으로는 대도시에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정을 다시 짠다면, 날짜를 이, 삼일 연장해서 카타니아를 둘러본 후 카타니아 공항에서 귀국하는 것이다. 그러면 앞서와는 달리 시계 반대 방향으로 팔레르모-아그리젠토-시라쿠사 (노토)-카타니아 순이 면 보다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이 또한 경험에서 얻은 지혜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 에트나 화산 트레킹과 자동차로 여러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옛 도시들을 꼭 한번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면 아그리젠토에서 기차를 타고 팔레르모로 오는 동안 바라다본 풍경에서 남쪽의 편편하고 밋밋한 해안선보다 북쪽해안은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섬은 화산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적인 화산 중 하나가 북동쪽 에트나 산에 있고, 또 북동쪽 밀라초 곶에서 북쪽으로 61km 떨어진 스트롬볼리 섬에 있다. 또한 북동쪽 해안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는 에올리에 제도(또는 리파리)의 화산 군도가 있다.
그리고 시칠리아는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 판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항상 지진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17세기 때 재건된 도시가 카타니아와 노토다. 나는 노토에서 건축물이 참 특이하고 인상적 바로크 양식이라 생각했던 게 바로 재건하면서 장식이 가미되었던 것이다.
시칠리아 섬은 동쪽 메시나 해협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와 분리되어 있고, 동쪽의 이오니아 해와 북쪽으로 티레니아 해를 접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북 아프리카의 나라 튀니지가 근접해 있다. 이러한 지형적 위치로 인해 시칠리아는 북유럽행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들이 거쳐가는 지역이 되었고, 특히 아그리젠토가 그 중심에 있다. 우리는 경제적 활동 범위가 거의 없는 이 작은 도시에 꽤 많은 아프리카인을 보면서 의문을 가졌었는데, 때마침 이민자를 태운 배들이 운행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또 시라쿠사의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에게 "봉주르(안녕하세요)" 하고 불어로 말을 걸어온 인상 좋은 청년도 아프리카 배냉에서 일 년 전 가족들과 시칠리아에 도착해 살고 있었다. 그는 현재의 삶에 만족해했다. 이처럼 오늘날 이 섬은 불법 이민자들로 몸살을 앓기도 하지만, 지중해 한가운데 자리해 고대로부터 수문이라 일컬을 만큼 항상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 결과 부분적으로 이 섬의 문화적 풍요로움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 한 예로 우리가 아그리젠토에서 벅찬 풍요로움으로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이 도시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고대 그리스 신전이 있다. 시칠리아와 그리스의 접촉은 기원전 13세기부터 시작되어 잠시 11세기에 중단되었다가 기원전 8세기에 와서 활발해졌단다. 이 섬에 최초의 그리스 식민지가 건설된 것은 기원전 735년이다.
시칠리아의 날씨는 지형적 특성으로 매우 다양한 지중해성 기후로써 겨울은 습하고 온화하며, 여름은 매우 덥고 건조하다. 건조함은 남쪽이 더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팔레르모의 해안 지역은 여름철 수은주가 밤에도 2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나, 낮에는 35도까지 오른다. 겨울 에트나 산 정상은 -3도까지 떨어지고 눈이 내리지만 동시에 해안 지역(예를 들어 팔레르모)은 15도에 머문다. 여름철 기온이 가장 높은 카타니아는 45도가 넘을 정도 덥지만, 겨울은 서쪽 지역보다 온도가 낮다. 이처럼 기후가 동질적이지 않다 보니 풍경이 다양하다기보다 아프리카적 분위기가 더해져 지중해 및 아열대 식물들이 자란다.
나는 팔레르모 공원에 있는 웅장한 열대성 나무들을 보면서 그 광경이 또 다른 바로크 양식의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이국적인 풍경이기는 하나 꽃피는 3월의 새싹들이 생동하는 모습은 아니었고, 오히려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파란 하늘아래 벚꽃과 튤립이 오색으로 흐드러져 지천에서 환호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만약 2월이었다면 노란 시칠리아 미모자와 아몬드 향기에 취해도 보았겠지만, 시들어가는 미모자 꽃만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낙관적 생각과 일반적 일기도에 너무 의존했던 탓에 얇은 옷 위주로 챙겨, 종종 추웠고, 결국은 두꺼운 옷 하나로 매일 지탱하는 꼴이 되었다. 여유분으로 모직 스웨트를 들고 오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요즘의 기상천외한 날씨를 직접 겪기 전에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4~6개월 동안 지속되는 가뭄으로 만성적인 물 부족과 식수 부족을 겪는다지만, 우리가 머문 동안만큼은 섬이 온통 푸르렀다. 난 해를 찾아서 떠났건만, 비가 따라다녔고, 그 가운데서 노란 점 같은 레몬과 오렌지가 생기를 주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며 바라본 풍경은 딱히 아름답다 느껴지지 않았다. 도심 외곽의 무질서하게 밀집된 현대식 주택과 짓다 만 건물들, 이 소홀하고 계획성 없는 모습에서 지하경제를 떠 올리게 했고, 시골 풍경도 마찬가지 밋밋해서 지루하기만 했다. 언덕마다 빈틈없이 개관된 목초지와 포토밭, 평지에는 옛 아랍인들이 <황금 소>라 불렀던 레몬과 오렌지 농장들 뿐. 익히 토질의 풍부함은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오랜 세월 끊임없이 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며, 섬에 불과한 이 작은 땅에서 이토록 풍성하고 아름다운 문명의 흔적들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이 경이스러운 유물들은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시라쿠사 고고학박물관을 비롯해 팔레르모, 그리고 아그리젠토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나는 이 엄청난 유물들을 놓치지 않으려 보고 또 보느라 눈이 쓰리고 현기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