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 / 제러미 월드론 (2017)
어려운 말로 깔끔하게 정리한 것들을, 다시 나의 말로 어지럽혀야겠다.
'혐오'에 관한 책을 읽었다. (정확히는 혐오'표현'이지만.) 끄덕거리게 되던 지점이 아주, 아주, 많았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고개가 쉽게 가벼워지는 모양이다. 옳지, 그랬던 거야, 하면서.
혐오표현이 넘실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언제든지 누구에 대해서든 혐오하기 참 쉬운 환경이다. 이민자, 노동자,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가릴 거 없이 이들에 대한 희롱과 비하가 아직까지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익숙하다. 인터넷 댓글창은 물론, TV 드라마, 술자리에서의 농담 등등. 꼭 심각하지 않더라도 가볍게 곳곳에 스며들 수 있단 점이 제일 위험하다. 그런 말들이 들릴 때마다, 늘 최소한의 대처로써 귀를 막거나 더러우니까 피한다는 심정으로 아무래도 그건 잘못됐어..라고 어물거렸다. 이제서야 겨우 조금씩, 하지만 그 말은 잘못됐어, 라고 수면 위로 얘기를 꺼내고 지적해보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 누구도 자신의 혐오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여성을 혐오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좋아하지. 다만 사실에 대해 말할 뿐이야." 그러면서 본인에게만 사실로써 존재하는 혐오를 객관적이라는 믿음 아래 거리낌없이 표현한다. 혹은 대놓고 당당하게 인정한다. "응. 나는 그게 그냥 싫어." "뭐 어떡하라구. 그냥 내 생각이야." 그리고 안타깝게도 극단의 시대에서 이런 식의 태도는 혐오에 맞서기 위해 혐오하고 또 혐오해서 그냥 끊임없는 혐오로만 가득 채워지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그러고 보면 혐오 자체는 잘못이 없다. 그냥 생각이니까. 생각만큼은 얼마든지, 정말 어디까지 상상하든 얼마든지 자유로운 거다. 그러니 혐오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 표현되는 순간 '표현'은 남는다. 비유하자면 아마도 깊숙히 마음 밑바닥에 깊이 침잠한다. 그 마음이란 것이 꼭 혐오발언의 대상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발언은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큼은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마치 포자가 바람을 타고 둥둥 날라다니다 어딘가 의도치 않은 곳에까지 날아가버려 안착해버린 것처럼. 확실한 건 바람이 그곳까지 가 닿았단 거다. 안타깝게도 혐오표현이 바람이 되어 멀리 날려버린 그 포자는 독이 든 꽃이어서 그것은 어디엔가 뿌리를 내리고 또 언제든지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만다.
비극은 그제서야 시작일 뿐이다. 혐오표현이 토대가 된 환경에서는 어떠한 혐오라도 또 다시 자라날 수 있다. 환경이란 일상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당연한' 무엇을 말하고, 혐오가 '당연해진' 세상에서 어떻게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개인이 환경을 이겨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개인이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면 더더욱.
같은 이치와 이유로 나에게 표현은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혐오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일상에서 뱉는 말과 행동이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 어딘가에 축적되고 있는 듯한 기분을 종종 느끼곤 한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를 둘러싼 환경을 건설하며 그것이 다시 나에게 다가온다. 지나치게 사릴 필요는 없겠지만, 어여쁘게 가꾸고자 하는 마음으로 물을 주듯이, 그렇게 표현들을 쌓아나가고 싶다.